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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소타 참전 용사들 전쟁 고아까지 품었다

6·25 70주년 특별기획 (3) 인연으로 지켜진 생명들

종전 후 한국서 입양 줄이어
지금도 1만5000여 명 거주

한국전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이 고아들을 데리고 온게 미네소타주 입양 역사의 시작이 됐다. 이 사진은 김병문 박사가 공개했다. 한국전쟁 당시 러셀 블라이스델 군목이 보관한 사진이다. 이후 그의 아들 카터가 김 박사에게 제공했다.미군들이 고아를 제주도로 피난시킨뒤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촬영한 것이다.

한국전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이 고아들을 데리고 온게 미네소타주 입양 역사의 시작이 됐다. 이 사진은 김병문 박사가 공개했다. 한국전쟁 당시 러셀 블라이스델 군목이 보관한 사진이다. 이후 그의 아들 카터가 김 박사에게 제공했다.미군들이 고아를 제주도로 피난시킨뒤 비행기에서 내린 직후 촬영한 것이다.

킴 잭슨 수석 아트 디렉터·쥬디스 에컬리 교수

킴 잭슨 수석 아트 디렉터·쥬디스 에컬리 교수

버려진 게 아니다. 인연으로 지켜진 거다. 미네소타주에는 가슴으로 낳은 생명이 많다.

한현숙(83ㆍ사진)씨는 미네소타주 한국 입양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외길만 걸었다. 미네소타아동복지회, 국제사회봉사회 등에서 40년간 해외 입양만 담당했다.

입양의 연분은 슬프게도 전쟁이다. 6·25는 고아를 양산했다. 곳곳에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한국전의 또 다른 그늘이었다.

한씨는 “미네소타주의 한인 입양 역사를 보면 미군들이 한국전 참전 후 이곳으로 돌아올 때 한국서 고아를 데리고 오거나 양자를 삼으면서 시작됐다”며 “이후 입양 기관들이 생겨나면서 한국의 아이들이 공식 입양 절차를 밟게 되면서 입양아가 더 많아지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미네소타주 참전용사를 돕는 김병문 박사 역시 “참전용사는 물론이고 그 자제들 중에는 아버지로부터 ‘한국전’ 이야기를 듣고 훗날 한국에서 아이를 입양한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미네소타아동복지회가 한씨를 통해 이곳에 데리고 온 한인 입양아는 무려 1만 명이 넘는다. 한국전 이후 가슴으로 품고 지켜낸 어린 생명들은 그렇게 미네소타로 건너왔다.

한씨는 “미네소타는 한인 사회 구성이 타주와 다르다. 이곳의 한인 입양아는 현재 1만5000여 명 정도로 추산하는데 한인 이민자보다 더 많다”며 “대부분 아기 때 미국인 가정에 입양됐기 때문에 한국어를 전혀 못하는 한인들”이라고 했다.

입양인이 한인 이민자 1.5배

주 공화당 의장도 입양인
센서스국 조사도 진행중


실제 센서스국에 따르면 미네소타 지역 한인은 총 2만995명(2010년 기준)이다. 이중 한국어 사용자는 5678명 뿐이다.

센서스국도 미네소타주 입양인 사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특별히 올해 센서스에서는 입양인 인구 조사도 하고 있다. 정확한 입양 인구를 파악하겠다는 심산이다.

미네소타주의 한인 입양아들은 사회 곳곳에서 활동중이다. 미네소타주 공화당 의장 제니퍼 카나한도 입양아다. 지난 2016년 국적을 회복해 한국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에서 활동한 마리사 브랜트(한국명 박윤정) 역시 미네소타주에서 자란 입양아다. 한때 골수 이식으로 한국에서 관심이 높았던 미 공사생도 성덕 바우만 역시 미네소타주 출신이다.

한씨는 “유명 체인 스토어 ‘타겟(target)’이 미네소타주에서 처음 생겨났는데 그때 창업자(존 제스)도 한인 여자 아이를 입양해 내가 도움을 줬다”며 “한국전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연이 여러모로 많은 곳이 미네소타주”라고 말했다.

피보다 진한 인연이다. 거기엔 가슴으로 낳고 키운 생명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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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입양아, 왜 미네소타인가

미네소타와 한국은 1950년을 기점으로 각별해졌다. 특히 가장 많은 전쟁 고아를 입양해 돌본 곳으로 기록됐다. 그 흔적을 따라가봤다.

“미네소타 입양아들 기록으로”
킴 잭슨 수석 아트 디렉터

킴 잭슨(사진)씨는 현재 ‘미니에폴리스ㆍ세인트폴 매거진’에서 수석 아트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해군에 있을 때 1950년대 초반 한국에서 근무를 했다. 그 인연으로 1973년에 미네소타로 나를 입양했다”고 말했다.

잭슨씨는 미네소타주 한인 입양아들을 한 명씩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나’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비롯됐다. 6년여의 걸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발간(2010년)된 사진집의 제목은 ‘HERE(여기에)’다.

그는 “친구가 사진집의 제목을 ‘THERE(거기에)’로 제안했는데 내가 나고 자란 이곳의 의미를 담아 제목을 ‘HERE’로 달았다”며 “이곳의 입양아를 담아내기엔 책 한 권으로 부족하다. 계속해서 ‘HERE’ 시리즈, 입양아들을 위한 기록을 남기는 일을 기회가 되는대로 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잭슨씨는 본업 외에 미네소타주 한인 사회와 입양 가족들을 위한 계간지(Korean Quarterlyㆍ1997년 창간) 편집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는 지금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한국’에 대한 의미를 물었다. 그는 “내가 돌아갈 수 있고, 나 자신에 대해 아직도 배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잭슨씨는 “한국은 나에게 고향, 조국…동시에 먼 나라,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부분이 많은 문화 등 여러 의미가 떠오른다”며 “그런데 이상할 만큼 상당히 친숙하다. 그 느낌은 역시 내 아이들에게 피를 통해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입양아 돕는 건 내 평생의 일”
미네소타대 쥬디스 에컬리 교수

쥬디스 에컬리(사진)는 미네소타대학 의과대학 부교수다. 소아과 전문의로서 현재 입양 아동 의학 클리닉 디렉터로도 활동중이다.

당시 에컬리 교수의 양아버지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것이 계기가 돼 에컬리를 입양하게 됐다. 그가 생후 5개월 때 일이다.

에컬리 교수는 ‘어머니’가 되고 나서 생모를 좀 더 이해하게 됐다.

그는 “내 딸이 태어나고 몇 달 후 양어머니가 ‘엄마가 되니까 생모 생각이 더 나느냐’고 묻더라”며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 당시 생모에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머니가 나를 위해 최선의 결정을 내린 거라고 생각한다.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컬리 교수는 학창 시절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다. 특히 고등학교 당시 ‘입양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다나 존슨 박사를 멘토로 만난 게 계기였다. 이후 입양 의학(adoption medicine)을 통해 미네소타주의 또 다른 입양 아동들을 돕는 길을 걷고자 결심했다.

그는 “위탁 양육 아이, 입양아는 물론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 등을 가진 아이, 가족 등을 만나 소아과 의사, 전문 치료사, 심리학자 등이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는 방법을 개발하고 있다”며 “입양 의학은 소아과 분야에서 작은 부분에 해당하지만 이것은 내가 평생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말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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