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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본능…거침없는 춤사위"

특별취재 / 재야 전통춤꾼 김운태씨, 9월6일 '만세무궁 콜로라도’ 공연

오는 9월6일 콜로라도 한인사회에 사상 최고,최대의 한국전통문화 공연단 '축제의 땅'이 찾아온다. '축제의 땅'은 유럽,중동,일본등 해외공연을 통해 '한류 바람'을 거세게 일으키고 있는 한국 최고수준의 예술단이다. '밀양 백중놀이'의 인간문화재 하용부, '교방춤'의 맥을 이어가는 방경랑을 비롯, 매우 독특한 춤세계로 국내외의 주목을 받고있는 재야 전통춤꾼 김운태등이 '한류의 진수를 펼칠 예정이다. 본국 중앙일보 최민우 김성룡 두 기자가 김운태를 만났다. <편집자>

어이가 없었다. 그는 인터뷰 자리에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그것도 꽤 고가의 영국산 로열 엔필드였다. 착 달라붙는 검은색 청바지에 범상치 않은 구두, 번쩍이는 헬멧과 선글라스, 허리춤에 걸친 여행용 가방까지. 한국 전통 춤을 춘다고 하기에 두루마기는 아니더라도 얌전한 옷을 입고 오겠거니 했건만 그는 예상을 비켜갔다.

그냥 취미 삼아, 혹은 튀기 위해 저러려니 했다. 그런데 철학이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는 게 거의 유일한 춤 연습”이라고 운을 뗐다.



“춤은 중심을 잡고 몸마디를 나눠줘야 한다. 오토바이가 그렇다. 엉덩이를 살짝 띄운 채 몸통은 컨트롤 능력으로 유지하면서 팔.다리의 쓸 데 없는 동작을 최소화해야 한다. 한 호흡으로 휙 달려야 멋진 춤이 나오듯, 오토바이도 코너링을 돌땐 거침없이 내달려야 죽음을 피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갔다.

“한국춤은 3분박의 곡선적이다. 그만큼 진동에 민감해야 한다. 그걸 난 오토바이를 타면서 체화한다.”

전통 춤꾼 김운태(45)는 그랬다. 잡초처럼 야전에서 혹독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독특한 춤 세계를 고집해 온 그가 콜로라도 무대에 선다. 9월6일 덴버 퍼포밍 아트 컴플렉스에서 공연되는 ‘만세무궁 콜로라도’에서다.

정재만.임이조 등 인간문화재로 유명한 당대 최고의 춤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러나 익히 김씨의 춤솜씨를 본 사람들은 “묘기에 가까운 한판 놀음을 콜로라도 한인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게 됐다”고 말한다.

김운태는 80~90년대 사물놀이패에서도 활동했다. 그는 “숨이 멈출 듯 뒤집기를 한 뒤, 몸을 가누지 못해 발을 질질 끌면서 나오는 흐트러짐이 가장 멋진 몸짓”이라고 말했다.
  
 "먹기 위해 춤췄다!"


그의 격렬한 춤보다 더 극적인 건 그의 삶이다. 김씨는 1963년 전북 완주에서 태어났다. 11남매 중 여섯째였다.

아버지 김칠선씨는 호남의 유명한 한량이었다. 젊은 시절엔 좌익 사상에 빠져 빨치산 경험도 있었고, 종합무술 공인 5단을 자랑할 만큼 주먹도 꽤 휘둘렀다. 방랑끼마저 다분하던 아버지는 60년대 들어 ‘호남 여성 농악단’을 결성해 전국을 유랑하며 다녔다.

그의 큰누이는 한때 ‘여자 김일’로 불리던 프로레슬러 김홍이었다. 여성농악단이 낯선 곳에 천막을 치고 공연할 때면 그의 누이는 출입문을 지키는 기도를 봤고, 그게 또 볼거리였다. 김운태에게 떠돎과 놀이, 그리고 장단은 마치 유전자처럼 그의 삶을 지배했다.

소년 김운태가 처음 천막극장 무대에 선 건 여섯 살 때였다. 일종의 바람잡이였다. 어수선한 공연의 첫 마당을 꼬마는 어릴 때부터 보고 익혀 온, 공중제비 같은 뒤집기로 시선을 모았다.

그렇다고 춤만 출 수도 없었다. 어떤 때는 소리를 한 자락 뽑아냈고, 어느 결엔 살풀이춤을 춰야 했으며, 징.꽹과리.장구도 칠 줄 알아야 했다.

“축구 잘하는 선수가 달리기는 기본이잖아요. 15명 남짓한 농악단 멤버들이 각자 주특기는 있지만 다들 조금씩 악기.춤.소리를 다 할 줄 아는, 이른바 멀티 플레이어였죠.”

이런 유랑 생활은 1년 내내였다. 봄이 오면 구례 곡우제를 시작으로 진해 군항제.남원 춘향제.강릉 단오제.경주 신라문화제 등을 전전했다. “학교 세탁을 했다”는 그의 말처럼 초.중.고를 제대로 다닐 수 없음은 당연했다. 대신 그는 무대에서 생존력을 키워갔다.

단원들은 관객의 호응에 따라 철저히 등급이 나뉘어져 있었고, 그에 따라 먹을 양식과 돈이 배분됐다. 16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이 된 그는 두 몫.세 몫 제비는 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는 1회 공연에 200회를 돌았고, 공연이 많을 때는 하루 1000회를 휘몰아쳐야 했다.

“저에게 예술혼이란 사실 사치스러운 거였죠. 저는 먹고 살기 위해 숨가쁘게 무대를 휘저었습니다.”

"따로 놂이 춤의 기본"

성인이 돼 나이트클럽과 요정을 드나들며 장단을 두드린 것도 그에겐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는 ‘채상소고춤’을 춘다. 소고라는 작은 북은 손에 들고, 상고를 머리에 쓴 채 돌리는 춤이다. 발끝으론 무대를 지르밟고, 손으로 소고를 두들기며, 머리론 묘기를 부리는 ‘따로 놂’이 춤의 기본이다.

무엇보다 공중을 휘휘 도는 ‘자반뒤집기’는 관객의 심박수를 최대한 끌어올린다. 그 역시 심장을 태울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극단을 향해 몸을 내던진다.

그는 “발을 무대에 내려놓는 착지 순간보다 공중에 붕 떠있는 체공이 더 안전해질 때 내 춤은 완성된다”고 말한다.

"춤 동선 미리 짜선 안돼"

 그는 따로 춤을 배우지 않았다. 그의 40년 인생의 ‘겪음’이 그대로 묻어날 뿐이다. 그래서 그는 공연을 앞두고 별다른 연습도 하지 않는다. “습관적인 연습이 오히려 알리바이가 돼 몸을 고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오히려 평상시 그는 음악에 젖어 있을 뿐이다. 음악을 몸안에 담아 ‘속박자’를 우려내고, 사뿐한 걸음걸이와 숨을 고르는 ‘휴지 동작’으로 자세를 가다듬은 뒤 이를 무대에서 그대로 폭발시키는 ‘즉흥’만이 있을 뿐이다.

“춤의 동선을 짜선 안된다. 어떻게 출 것인가도 중요하지 않다. 이 무대가 과연 내 삶의 진실을 담고 있는가에만 몰입한다”고 그는 말한다.

재야를 떠돌던 무림의 고수는, 과연 콜로라도 한인들에게 어떤 흥과 한을 선사할까. 오는 9월6일 덴버 퍼포밍아트센 컴플렉스터가 흥분과 감동의 물결로 한바탕 출렁일 것같다. 

최민우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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