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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열 목사 목회칼럼: 고난의 신비

침례요한은 광야에서 구세주가 오심을 외치며 회개의 침례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하였다. 동시에 침례요한은 광야에서만 머물지 않고 분봉왕 헤롯의 추악한 죄악을 지적하였고 그 결과 참수형을 당하였다. 침례요한의 비참한 최후 소식은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반적인 예상은 무엇인가? 신명기 28장과 조엘 오스틴과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축복의 원리에 의하면 침례요한은 하나님께 충성하였기 때문에 이 땅에서도 축복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충성스럽게 산다면 누구든지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잘 먹고 잘살며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역사적으로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땅에서도 기름지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인과율적인 축복관만 주장하고 삶의 다른 방식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 하지 않는 신앙은 기복신앙과 값싼 복음으로 전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모든 신실한 성도들이 이 땅에서 편안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에 더 큰 고난과 가난과 악함을 경험해야 하는 인생들도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 한 사람이 침례요한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소개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침례요한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예를들어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렇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할 때 사방으로부터 반대와 조롱과 핍박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도 그렇고 침례요한과 믿음의 선배들은 고난은 받았지만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기까지 순종하였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받는 고난에 어떤 신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신비란 일반적인 상황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는 일반적인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낸다. 신비는 축복과 저주에 관한 인과율적인 법칙을 벗어난다.

일반적으로 고난이 있고 실패가 확실한 길이라면 그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가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필코 그 고난의 길을 끝까지 갔다. 왜 그런가? 고난에 담긴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신비는 여러 가지 각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예레미야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고난에 담긴 신비가 무엇인지를 추적해 보자: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렘 20:9)

나는 예레미야의 고백에서 성도가 경험하는 고통의 신비를 발견한다.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사역 때문에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다. 그렇다면 선지자의 사역을 포기하면 고통의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선지자의 사역을 포기하지 못하고 끝까지 완수하고자 하는 갈증과 의지를 내면 깊은 곳에서 경험하였다. 망하는 길이고 손해 보는 길이고 자존심 상하는 길이고 가난해지는 길인데...이 길을 충성스럽게 끝까지 가야만 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의 갈증과 의지가 고통 속에 담긴 신비인 것이다.

침례요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침례요한은 세상의 불의에 타협하며 적당하게 사역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감옥에 갇히지도 않고 편안한 일생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불의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책망해야 한다는 불타는 의지와 갈망이 컸기 때문에 선지자의 사명을 완수하였고 그 결과 참수형으로 인생을 마쳤다.

일생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간 성도들도 많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성도들도 많다. 신실하게 복음을 증거하며 헌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듯한 실패한 인생으로 마친 성도들도 있는 것이다.

신실한 믿음의 종들이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은 어쩌면 우리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다. 특별히 성도가 이 땅에서 고난 (질병, 억울함, 가난, 실패)을 받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답답함도 있지만 일종의 신비다. 하나님만이 아시는 통치의 영역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 고난 자체가 그리고 고난 받는 것이 실패는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앙의 선배들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실패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침례요한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권력에 대항하여 무참하고 억울하게 세상을 마무리한 실패한 자다. 그러나 성경은 침례요한을 성공한 사람으로 분봉왕 헤롯은 세상에서 온갖 권력과 부귀와 사치와 쾌락을 누리며 성공한 자였지만 가장 실패한 자중에 하나이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다.

오늘날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에서는 하나님 믿고 성공하고 잘 산다고 한지만 과연 그 부요함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공적인 것인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 또한 세상에서 실패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옳은 것이라면 절망하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담대하고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고난에는 신비가 담겨있다. 성도가 고난 받는 것과 아무 잘못 없이 질병과 자연재해로 고통 받는 원인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명감과 갈증과 의지도 신비로 다가온다.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보다 불편하고 고통스런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하고 더 복될 수 있다는 역설적인 현실도 신비로 다가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 (눅 6: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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