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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옥순 칼럼]짧은 여행이 주는 ‘삶의 진수’

쿵쿵거리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애틀랜타 도심을 벗어나 5시간을 달렸더니 이국적인 풍경이 메마른 가슴을 흥건하게 적셨다. 하늘 향해 죽죽 뻗은 야자수,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와 마주한 순간 내면 깊숙이 자리한 침전물이 시나브로 빠져나가고 영혼이 맑아진다. 동행한 네분의 어르신도 그랬을까. 연신 “아, 좋다! 아, 시원하다!” 경탄을 쏟아 내셨다. 그렇다. 여행은 힐링이다. 누구에게나 가슴 뛰는 일이다. 지난 메모리얼 연휴, 어르신들과 오랜만에 여행길에 올랐는데, 2박 3일 내내 얼굴에 웃음을 달고 계셨다. 설렘을 감추지 못한 어르신들의 안색이 어찌나 화사한지 초여름 꽃잎에 떨어지는 짱짱한 햇살 같았다. 덕분에 일상에 지쳐 달구어진 쇳조각 같던 내 마음에도 단비가 내린 양 싱그러운 기운이 꽉 들어찼다.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딸린 ‘프립 아일랜드.’ 차가운 침묵, 순정한 고독만이 찰랑찰랑 넘실대는 섬. 그러고 보니 이 섬을 드나든 지가 어언 5년째다. 메모리얼 연휴만 되면 찾는 곳이나 가슴은 여전히 설렘과 떨림으로 요동친다. 서둘러 체크인하고 아늑한 숙소에 여장을 풀기 무섭게 바닷가로 들고뛰었다. 하얀 파도가 철썩철썩 살아 움직이는 광활한 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만사 다 잊고 시퍼런 자유를 만끽할 터였다. 광속으로 내달리는 복잡다단한 세상이 섬에서는 정지화면이다. 망망대해 시퍼런 바다가 우리를 둘러 진을 쳤으니, 삶의 난제들은 동화 속의 이야기! 그뿐이랴, 두고 온 삶터, 조지아는 10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로 숨이 턱턱 막힌다는데 청색 바다에는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오롯이 자유와 평화만 출렁거렸다. 자유와 평화의 봇물 속에 내가 서 있나니! 단박에 옹졸한 품이 하해(河海) 같이 낙낙해졌다. 5년 전 지도 한 장 들고 찾아간 섬. 처음엔 낯설기 그지없었는데, 이젠 고국에 두고 온 유년의 고향마을 같다.

고대 중국의 병법서, 삼십육계는 전쟁에서 쓸 수 있는 36가지의 책략을 적은 책이다. 우리에게 줄행랑으로 알려진 제36계는 상대가 너무 강해서 맞서 싸우기가 어려울 땐 피하여 힘을 길러 후일을 도모하라 이른다. 이는 복잡다단한 현대를 사는 아니, 하 수상한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에게 정금 같은 지혜이다. 전대미문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활인으로 사는 일이 곧 스트레스!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힌 인생의 난제 가운데서 이리저리 부대끼고, 사람 속에 치이다 보면 현실에서 달아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럴 땐 일상을 놓고 산속에 숨고 싶다. 그런즉 새 힘 받아 살라는 내면의 부자가 울리면 자연이 들려주는 원초적인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고루한 나를 돌아보고 삶을 가지 쳐야 한다. 일상에서 줄행랑쳐야 다시 살 수 있더란 말이다.

단테가 신곡의 서두에서 언급한 고백처럼 나도 인생의 중반에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일순 가슴이 철렁했다. 삶을 전복시키는, ‘돈, 명예, 권력’, 까딱 잘못 휘둘렀다가 인생을 구렁텅이로 내모는 무서운 3종 세트는 나와는 무관했다. 그런데 비즈니스를 하다 보니 무관하다고 치부한 돈이 문제였다. 오해 마시라, 돈을 많이 번 것이 아니다. 회사 살림을 꾸리다 보니 매사 계산기를 두드리게 되고, 그사이 내 영혼이 피폐해지고 있더라. 치열한 비즈니스 현장에서 가슴이 말라가고 있더라. 물살 센 강을 꿋꿋이 건너와 영혼이 드맑아야 할 중년에 한갓 돈을 좇으면 안 된다는 깨달음이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하던 날, 나를, 내 영혼을 돌보라는 내면의 북소리가 천둥처럼 달려들었다. 무서웠다. 고마웠다.
여행은 정신을 혁명한다. 맞다. 짧은 여행에서 삶을 리셋하고 에너지를 충전한 사람이 나뿐이랴. 기실 내 옆지기도, 네분의 어르신도 한여름 목을 축이는 청량제 같은 쉼이 절실했다. 삶의 현장, 그 울타리에 갇혀 매일 주어진 생의 쳇바퀴를 묵묵히 돌려야 하는 우리는 시퍼런 자유와 평화가 너울대는 검푸른 대양에서 영육을 어루만졌다. 활기를 흠뻑 들이마셨다. 무엇보다 평생 해온 비즈니스를 하루아침에 접을 수 없어 몸도 마음도 사막을 타박타박 걷는 낙타처럼 지친 어르신, 길을 잃고 어두운 숲 속을 헤매던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밤사이 이슬을 흠뻑 먹고 어둑새벽 반짝반짝 되살아난 한여름 채소처럼 깨어났다.



마음을 풀어놓고 고민을 나누며 소통하고 공감하고 웃다 보니 영혼이 충만해졌다. 짧은 여행이 주는 삶의 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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