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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 칼럼] 생각하기 좋은 배경

추수감사절 주말, 기록적인 11월 눈폭풍이 몰아쳤다. 이후 강추위가 계속되면서 7~8인치 안팎의 눈이 녹지 않고 곳곳에 쌓여 있었다. 얼어붙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뭇가지들이 툭 툭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이렇게 한겨울이 닥치고, 봄까지 눈이 녹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 화씨 40도대의 포근한 날씨가 찾아왔다. 만년설처럼 견고하던 눈의 흔적이 시나브로 사라지고, 초록빛 사계절 잔디가 맑은 빛을 드러냈다. 녹은 눈으로 얼굴을 말끔히 씻은 상록수 잎들은 마치 봄날 새순처럼 싱그럽고 투명했다. 순식간에 겨울 풍경이 달라졌다.

한 삽 한 삽 눈을 퍼 올린 사람들의 노동력, 제설차의 강력한 엔진도 속수무책이던 눈의 습격을 40도대의 높지 않은 기온이 단숨에 해결한 셈이다. 인간의 능력과 첨단 기술은 불과 10도 안팎의 기온 차가 만들어낸 변화에 비하면 참 보잘 것 없었다.

눈 녹은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일찌감치 황금색 이파리를 모두 떨궈버린 회화나무와 달리 자작나무와 포플러는 몇 몇 가지에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의 잎들을 매달고 있었다.



문득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저 잎들은 피어날 때 누가 먼저 떨어질 지, 어떤 잎이 가장 오랫동안 가지에 매달려 있을 지 알고 있었을까. 한 가지에서 순서대로 움을 틔우지만, 떨어질 때는 그 순서가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을까.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연둣빛 잎들을 함께 키워가던 시간, 언젠가 인사를 나눌 겨를도 없이 헤어지게 될 거란 사실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여름철 따가운 햇살과 이따금 쏟아지는 폭풍우를 견뎌낼 때 서로에게 힘이 되었을 것이다. 중서부 특유의 거친 바람을 마주할 때, 서로를 꼭 붙들어주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겨울나무를 바라보다 도종환의 시 '겨울나무'를 떠올렸다. “잎새 다 떨구고 앙상해진 저 나무를 보고 / 누가 헛살았다 말하는가 / 열매 다 빼앗기고 / 냉랭한 바람 앞에 서 있는 / 나무를 보고 / 누가 잘못 살았다 하는가”

시인 박정원이 “나뭇가지와 땅 사이 그 길을 걷기 위해 나는 / 평생 한군데에서만 매달려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겨울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꼭 꼭 감춰 두었던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겨울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시카고의 길고 긴 겨울 풍경은 생각하기 좋은 배경이다. <발행인>


노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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