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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만진 문학칼럼: 생의 마지막 인사, Viewing

가톨릭교회는 해마다 11월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정하고 교회 전체가 세상을 떠난 부모나 친지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을 위해 기도를 바친다. 아울러 언젠가는 다가올 자신의 죽음에 관해 묵상하는 특별한 신심의 달로 지낸다. 죽음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순히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옮겨간다는 고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인연이 늘어가고 따라서 장례식에 갈 기회도 많아졌다.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05년 초에 선종하신 지인의 연도에 참석했었다. 그날, 고인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Viewing’이라는 문화를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큰 충격을 받아 한동안 불편한 상념에 잠겼었다. 천주교에서는 연도와 장례미사로 이어지는 정중한 예식으로 고인을 떠나보낸다. 장례기간 중에 바치는 연도煉禱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세상에서 죄를 다 씻지 못하고 연옥煉獄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연령煉靈, 즉 연옥 영혼을 위한 기도이다.

교우들과 합동으로 바치는 연도가 끝나면 앞으로 나아가 정장 차림으로 관속에 안치된 고인과 Viewing 이별을 한 후 유족들을 위로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식 장례문화에 너무나 놀란 나머지 처음 뷰잉 시에는 머릿속이 하얘져서 고인에 대한 예의와 가족들의 위로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문상을 하러 가게 되면 고인의 영정 앞에 향을 피우고 절을 한 후 유족과 맞절을 하면서 위로의 말을 전하고 음식을 나누는데,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주검과 직접 마주하는 것은 처음이라 정말 충격이었다.



우리가 지금 100세 시대를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주위를 돌아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지난달 어린 자녀를 둔 자매가 투병 중에 하늘나라로 간 안타까운 일이 있었기에 이번 위령성월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황창연 신부의 강론인 “죽음 껴안기”에서 죽음이 무서운 이유로 첫째는 두려움이요, 두 번째는 정든 가족과 친지와의 이별이라고 했다.

신앙인은 누구나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나라에 올라 영원한 삶을 누리리라는 부활 신앙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죽음이 두렵고 이별이 안타까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이 태어나서 80 평생 생로병사의 여정을 살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나는 이미 70년을 살아냈으니 잘 지냈든 못 지냈든 어쩔 수가 없지만, 앞으로 남은 십여 년을 값지고 보람 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이 “추억, 선행, 믿음” 3가지라고 했으니 아름다운 추억도 많이 만들고 선행을 베풀며 하느님 보시기에 흡족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겠다고 새롭게 다짐해본다.

요즘은 교우들과 합동으로 바치는 연도가 끝나면 고인에 대한 경건한 예의와 평소의 우의에 대한 사랑으로 Viewing에 임하게 된다. 이별은 슬프지만, 그분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나를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보낸다. 한국과 또 다른 부분은 장례미사 절차가 끝난 후에 유족 대표가 나와서 조문객들에게 고인과의 추억을 나누는 시간이 있다. 다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이야기들이지만 자식들이 아닌 손주들이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와의 추억과 함께 고마운 마음을 눈물로 전할 때는 가슴이 뭉클하다. 나 또한 손자와 손녀에게 정을 쏟고 있지만, 어떤 추억을 그들에게 심어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또 한 가지 미국의 공동묘지는 단어가 주는 을씨년스러움과는 달리 평지에 있으면서 공원같이 잘 꾸며 놓았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묘지 표석들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미국에서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낯선 도시에 들어서면 도심 한가운데 혹은 주택가에서 공동묘지를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는 혐오 시설이라고 해서 추모공원을 주택가에 세울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곳’이 묘지Cemetry 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도시의 역사가 깊다 보니 처음에 외곽에 있던 공동묘지가 도심이 발달하면서 주택가에 가까워진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먼저 간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언제든지 찾아가서 살았을 때처럼 대화를 나누고 싶은 것이 미국인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국인이 가진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둔 조상 숭배 정신은 바람직하지만, 묘지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추석 한식 등 1년에 한두 번 형식적으로 찾으면 된다는 요즈음 풍속이 아쉽다. 이곳 미국에서 10여 년 넘게 살다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지난 4월 부활절이 지난 후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800km 전 구간을 순례한 것은 아니지만, 나를 돌아보며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성찰하면서 걷고 또 걸었다. 자연스럽게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까지도 생각이 미쳤다.
우리는 모두 위령성월을 보내면서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보다는 그동안의 삶을 기록하거나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는 등 요즘 회자되는 ‘Well-Dying’ 준비를 통해 자기의 주변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며 후회 없는 여생을 보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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