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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졸작(拙作) 문장에 거는 희망

북한은 구호의 나라다. 구호는 복잡한 국가 이념과 운영철학을 한 두 마디로 정리해 단순화한다. 북한의 존재 이념은 주체사상이다. "김일성 동지의 사상.리론.방법"을 체계화한 주체사상은 간단하지 않다. 1985년 출간된 '위대한 주체사상 총서'는 모두 10권이다. 하지만 이 방대한 전집을 한마디로 줄인 구호가 존재한다.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이다. 이런 삶의 결실은 무엇인가? 또 하나의 구호가 답해준다. "세상에 부럼 없어라."

북한 최고지도자의 핵심적 통치 방식인 현지 지도 또한 구호성이 강하다. 그렇기에 행정 책임자들은 최고지도자가 내어놓는 구호성 지시들을 손바닥만한 수첩에 적을 수 있다.

구호는 압축미가 생명이다. 서술적이기보다는 자극성이 있어야 하고 시적이기보다는 직설적이어야 한다. "조선인민의 철전지 원쑤인 미국을 소멸하라!"라는 구호를 붙들고 북한은 결국 '핵무기 병기화 사업'에 성공했다.

이렇게 구호 생산능력이 뛰어난 북한의 최근 형편없는 문장을 구성해 세상에 내어놓았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2019년 신년사에 나온다.



"다만 미국이 세계 앞에서 한 자기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그 모습을 강요하려 들고 의연히 공화국에 대한 제재와 압박으로 나간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나라의 자주권과 국가의 최고 이익을 수호하고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이룩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이 비핵화를 위해 취한 북한의 결정에 상응하는 조처를 하지 않고 계속 제재와 압박으로 일관한다면 북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경고인데 문장 구성력 측면에서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마지막 핵심 문장을 다시 보자.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화자(話者)가 취하고자 하는 행동에 대한 주저함을 이보다 더 드러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어쩔 수 없이"와 "부득불"은 의미가 비슷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원하지는 않지만 행동을 취하겠다는 것인데 문장 구성상 감점요인인 췌언(贅言)이다. 북한이 다시 핵실험, 핵무기 개발, 미사일 발사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표현은 경사를 지그재그로 속도를 줄여가며 내려오는 방어운전의 모양새다.

관심을 끄는 또 다른 문장도 악력(握力)을 누그러트리는 뉘앙스가 담겼다. "조선반도정세긴장의 근원으로 되고 있는 외세와의 합동군사연습을 더 이상 허용하지 말아야 하며 외부로부터의 전략자산을 비롯한 전쟁장비 반입도 완전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한미합동군사연습과 전략적 무기를 동원한 군사적 압박 시위를 완전히 그만두라는 요구가 아니라 그 중지를 "주장"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주장은 'Opinion'이고 요구는 'Demand' 이다. 주장은 요구를 가능케 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한 단계 전이다.

북미간에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2017, 2018년 두 해의 신년사를 보면 2019년 신년사의 완곡함과 온순함이 확연히 느껴진다. "우리의 문전 앞에서 년례적이라는 감투를 쓴 전쟁연습 소동을 걷어치우지 않는 한 핵무력을 중추로 하는 자위적 국방력과 선제공격능력을 계속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2017년 신년사) "이 땅에 화염을 피우며 신성한 강토를 피로 물들일 외세와의 모든 핵전쟁 연습을 그만둬야 하며 미국의 핵장비들과 침략 무력을 끌어들이는 일체의 행위들을 걷어 치워야 합니다."(2018년 신년사)

미국은 북한의 2019년 신년사에 포함된 이례적으로 복잡한 문장 구조의 진의를 파악한 듯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나 또한 북한이 위대한 경제적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아주 잘 인식하고 있는 김 위원장과 만나기를 고대한다!"고 반응했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지 사전 답사가 진행 중이라는 보도도 나왔다.

펀치라인(결정타 문장)이 어정쩡한 낙제점 작문에 희망을 거는 2019년이다.


이길주 / 버겐커뮤니티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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