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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마당] 기억 저편에 숨어있던 산토끼

남편 토마스의 누이동생이 부모님이 전에 살던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됐다. 다락을 치우다가 서류뭉치를 발견했는데 그중에 토마스 입양 바로 전, 한국 고아원에서 보낸 편지가 있었다며 우리에게 보내왔다. 오랜 세월 바래서 부스러질 것 같은 종이에 어설픈 영어로 타이핑을 한 편지 내용은 무슨 우수제품 설명서 같은 내용이었다. 밥도 잘먹고, 잘 자고, 친구들이랑 싸우지 않고, 잘 노는 건강한 아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제일 마지막에 P.S.로 "특히 노래에 재주가 있다. 산토끼와 송아지를 아주 잘 부른다"라고 써 있었다.

그날 밤 자려고 누웠는데 남편은 산토끼가 어떤 노래냐, 한번 불러달라고 했다. "산토끼 토끼야…" 가만 듣더니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불러달라고 해서 열 번 넘게 불렀다. 누워서 이불 덮고 산토끼를 그렇게 여러 번 불러본 적이 없었다. 계속 "한번만 더"를 해서 에잇, 그만! 하며 소리를 지르고 그를 보니, 그는 막 울고 있었다. 내 가슴에 무슨 차가운 돌멩이가 걸린 것 같았다. "나, 이 노래 알아, 기억이 나" 하면서, "어디로 가느냐?"가 "어디 가요?"랑 같은 말인지 물었다. 자기가 그 말을 많이 한 기억이 난다고 했다. 그럼 직접 한번 불러보라고 했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유치원 아이들이 하는 식으로 손을 앞으로 잡고 산토끼를 얼마나 정확히 잘 부르던지… 늙은 아이가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산토끼. 그도 울고 나도 울고, 한참 많아 안아 주었지만 잠이 오질 않았다.

남편은 한국전쟁 후 네, 다섯 살쯤에 버려져서 길에서 살다가 고아원에 보내졌고 1957년 미국으로 입양이 되어 온 혼혈아이. 어둡던 그의 시작과는 달리 활발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진, 한 성공한 인간으로 이제 60을 바라보는 그는 아직 그 거지 아이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감사한 것. 물론 한국말은 다 잊었고 그 아픔들도 다시 떠올리지 않으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러나 그 기억 저 밑에 가라앉아 있던 그 암담하던 시간들이 산토끼 노래에 묻어 나와 버린 것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힘든 일들을 가슴 깊숙이 묻어 버린다. 그래야 살아 남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말, 냄새, 맛, 이미지 등이 그 가라앉았던 시간들을 다시 살려낸다. 그리곤 세월이 주는 망각과 너그러움에도 불구하고 다시 가슴이 저려온다. 그것들을 다시 가라 앉히는 데는 현재라는 시간의 힘과 그간 쌓아온 내공이 다 들어붙어 다둑거려도 서늘한것. 이제 우리에게 산토끼 노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노래가 되었다.




김원숙 / 화가·인디애나 블루밍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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