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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잊지 말아야 할 ‘잊혀진 전쟁’

민족사에 깊은 상처를 낸 6·25전쟁이 어느새 70주년을 맞았다.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키다 13만8000명의 젊은 목숨이 희생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전사한 장병들의 영원한 쉼터를 위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동작동 산언덕에 터를 잡았다. ‘국군묘지’라 명명해, 1954년 3월 육군건설공병단이 공사를 시작했다. 그게 바로 국립서울현충원이다. 정부는 1956년 현충일을 정해 해마다 6월 6일 산화한 영령들을 추념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조선인민군의 기습 남침을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약 3년 1개월 동안 계속됐다. 한국군의 결사적인 항전과 유엔군의 참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 등으로 전쟁 초반의 열세를 극복하고 두만강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휴전에 이른다. 엄청난 손실을 가져온 6·25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아 철책선을 사이에 두고 쌍방이 총을 겨누고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병들은 이제 80대, 90대의 고령자들로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영하 30~40도 추위에 소총 하나 들고 피의 전선을 누비며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말없이 헌신한 세대들이다.

1950년 8월 시인 모윤숙은 피란길에서 혼자 죽어 넘어진 국군을 본 후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라는 시를 썼다. ‘…가슴에선 아직도 더운 피가 뿜어 나온다/ 장미 냄새보다 더 짙은 피의 향기여!/ 엎드려 그 젊은 죽음을 통곡하며/ 듣노라! 그대가 주고 간 마지막 말을….’



“내가 후퇴하면 나를 쏘라”며 장병의 선두에 서서 낙동강 교두보를 지켜낸 6·25전쟁 영웅 백선엽 장군을 친일파로 공격하고, 국립묘역에서 ‘친일파 묘’를 파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북한에 의한 6·25 남침 70주년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정부는 ‘남북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슬픈 역사’ 정도로 6·25 전쟁의 의미를 폄하하고 있다.

요즘 탈북민 단체에 의해 살포된 대북전단에 몹시 화가 난 북의 제2인자 김여정이 파렴치한 욕설과 함께 남한을 적국이라 부르며 모든 통신선을 끊었다. 또 대남사업을 대적사업으로 전환했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권에서는 종전선언을 들고 나오기도 한다. 급기야 북한은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시켜 대내외에 한국과의 단절을 선언했다.

해외에서는 언제부터인가 6·25한국 전쟁을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르고 있다. 6·25전쟁은 잊어서는 안 되는 비극의 역사다. 이 슬픈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6·25전쟁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국 국민의 80% 이상이 6·25전쟁의 참상을 겪어보지 못한 전후세대다. 오늘의 역사보다 내일의 역사가 보다 희망적이 되려면 처절한 전쟁으로 죽어간 무고한 이들의 희생을 기억해야 하고 북한의 침략으로 찢겨진 산하와 민족적 상처도 가슴에 새겨야 한다. 한반도에 6·25전쟁 같은 비극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


이재학 / 6.25참전유공자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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