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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산책] 큰어머니와 시인

요즘에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두께가 두꺼운 책 한 권 가운데에 책갈피를 끼워두었거나 모서리를 접어 두었던 하나의 페이지를 다시 펼쳐보는 듯이 그리운 사람이 있다.

우선 큰어머니 생각이 난다. 독자들을 만나는 강연을 여러 곳에서 하게 되면서 내 문학의 태생지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하나의 장면이 나의 옛 시간에 빛바랜 사진처럼 들어있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큰 가마솥과 그 솥 한가운데 놓인 둥근 그릇의 광경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어릴 적 시골집 부엌에는 큰 솥이 하나 걸려 있었다. 그 솥을 걸어놓고 어머니는 아궁이에 불을 때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그런데 내 집은 가난해서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그리고 그 큰 솥은 식은, 빈 솥으로 남겨져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런 내 집의 궁색한 형편을 돌보는 이가 바로 큰어머니였다. 한 동네에 살았던 큰어머니는 우리 집 식구가 불안해보이고 염려되었는지 손에 뭔가를 들고 찾아왔고, 집에 들러서는 앞마당이며 뒤란이며 부엌을 둘러보았다.

겨울에는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보며 방에 온기가 있는지를 살폈다. 그런데 그 식은, 빈 솥 한가운데에 먹을 것을 놓아둔 이도 큰어머니였다. 대개 아무도 없는 낮에 잠깐 들러서 양식거리를 놓고 가셨다. 들에서 늦게 돌아와 저녁을 지으려는 내 어머니가 그 솥을 열어보고는 큰어머니가 다녀가셨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 식이었다.



큰어머니는 참으로 인자하고 신중한 분이었다. 남의 말을 하지 않았다. 작은 키와 왜소한 몸이었지만 말씀이 부드러웠고 남의 흠담을 피하셨다. "나는 그런 말은 내키지 않네"라고 말해 피하셨고, 아랫사람에게도 늘 점잖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잠잘 때 머리맡에 두고 자는, 한 그릇의 맑은 물 같은 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어머니에겐 사람으로서의 엄숙함 같은 것이 있으셨던 게 아닌가 싶다. 삶이라는 터에 고난은 탱자 울타리처럼 둘러쳐져 있지만, 사는 일의 그 어떤 애틋함과 정중함과 숙연함 같은 것을 몸소 잘 보여주셨던 분이 큰어머니가 아니셨나 싶다.

내가 문득 떠올리는 또 한 분은 조정권 시인이다. 최근에 한 문학 잡지에서 두 해 전 작고한 조정권 시인의 삶과 문학세계를 특집으로 다뤘는데 그것을 읽으면서 조정권 시인과의 인연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시인의 낮고 차분한 말씀과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몸동작에서 어떤 경건한 위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인은 시인이 지녀야 할 마음에 대해 돌아보게 했다. 시인은 시 '설원을 향해'에서 "백지/ 흰 고독/ 고독은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힘이네"라고 썼다. 시 쓰는 이의 앞에 놓인, 어떤 언어도 태어나지 않은 그 백지와 그 백지를 앞에 두고 느끼게 되는 무거운 고독의 시간을 시인은 감내하겠노라고 스스로 밝혔던 것이다.

한 시집에 적은 '시인의 말'에는 "소란스러움과 서두름 속에서도 늘 평온함을 유지하기를. 정적에 싸인 곳을 기억하기를. 한때 소유했던 젊음의 것들을 우아하게 포기하고 세월의 충고에 겸허히 의지하기를. 자신에 온화하기를"이라고도 썼다. 시인은 너무 세속적이지 않기를 바랐고, 흰 눈과 얼음을 이고 있는 산정(山頂) 같은 것을 우러러보아서 절망을 잘 견뎌야 한다고 했다.

이 두 분을 떠올리게 된 것은 성지를 찾아가는 한 순례자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를 본 직후였다. 성지에서 고개를 깊게 숙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순례자를 보는 순간에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김소월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에게 있는 엄숙" 같은 것을 느꼈다.

아무튼 이 가을에는 순례자의 눈물에 대해서 오래 생각해보게 될 것 같다.


문태준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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