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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낱말풀이 퀴즈

이게 얼마 만인지. 가볍게 아침을 먹고 상 차리기는 내가, 설거지는 남편이. 이젠 공식이 돼버린 생활 속에서 설거지하는 남편을 두고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종알종알, 인터넷 기사를 말해주다 식탁 한쪽에 놓인 신문을 펼쳐본다. 또다시 관심 상관없이 기사를 공유하다 ‘낱말 퀴즈’를 보았다. “우리 낱말 퀴즈 해보자.”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뉴스를 접하지 않던 시절. 대문 앞에 ‘신문 사절’이란 공고를 협박처럼 붙여 놓아도 한 달 무료라며 던져 놓고 가던가, 1년 정기구독을 하면 선물을 준다며 신문 한 부를 들고 와 구독 요청을 하던 때. 난 학창시절 세상 뉴스엔 별 관심 없고, 연예 기사나 한참 인기 있던 프로야구 기사 읽기가 전부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던 낱말 풀이. 결혼한 언니 가족과 함께 살던 나는 언니 형부와 소주 한 병을 반주 삼아 나눠 마시며 저녁 식사를 하고, TV 앞에 모여 앉아 종종 낱말 풀이를 하곤 했다. 한 번씩 난관에 부딪히던 법률 용어 외엔 거의 다 풀 수 있는 것들이라 우리의 나른한 시간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물소리에 제대로 들릴 리도 없고, 그리 어려운 단어들도 아니기에 혼자 풀어도 충분한데 “1번 가로!” 하며 큰소리로 읽는다. 그리곤 또 답을 말하며 빈칸을 채워 나간다. 가로 38번 세로 36번. 서른여덟 개의 낱말을 다 풀 때까지 난 종알댄다. 처음엔 관심 없어 하던 남편이 어느새 설거지를 다 하고 옆에 서 있다. 쉬운 말에도 내가 잠시 멈칫하면 “00”하며 동참한다. “맞아! 맞아! 왜 그 말이 생각 안 났지?” 하며 깔깔댄다.

그중 들어 본 듯하면서도 생소한 ‘발록구니.’ ‘하는 일 없이 놀면서 돌아다니는 사람.’ 딱 막혀 버렸다. 내 머릿속엔 ‘백수’ 두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네 글자란다. 서른 몇 번째까지 와서 이게 뭐라고 참 짜증이다. 모르면 가려진 해답을 보거나 검색 한 번만 해도 된다.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시합도 아니다. 가로세로 단어에 세 글자가 이미 나와 있으니 답은 이미 나와 있고, 짐작으로 해도 되련만, 이게 뭐라고 괜한 승부욕에 혼자 쩔쩔맨다. 머리를 쥐어 짜듯 해 빈칸을 채우고 답을 보니 맞았다. “우리 다 맞췄어!” 참나. 큰일을 해낸 듯 떠들어댄다.



결혼 전 어느 날, 당시 인기 있던 ‘스포츠서울’이란 신문에 아마도 연말 행사로 100문제 낱말퀴즈 풀이가 나왔었던 듯하다. 지금은 옆에서 그런 모습을 보며 피식 웃는 남편이 그 문제를 다 풀고 몇 문제 빈칸을 남겨 놓고는 내게 내밀며 못 풀었다고 풀어 달란다. 행사 형식이라 평소보다는 난이도가 있는 단어들이 있기는 했다. 다행히 빈칸을 채울 수가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내게 일종의 접근 방법으로 알고 있는 것을 남겨뒀다고 했다.

그러나 꼭 그 빈칸을 채워 넣어서가 아니라 어쨌든 우리는 삶이란 여백에 각자 다른 뜻을 가졌으면서도, 날실과 씨실로 엮고 또 엮어 옷감을 짜내듯 가로세로 절묘하게 맞춰 가며 30여 년을 채워가고 있지 않나. 뒤돌아볼 여유도 없이 허둥대며 바쁘게 살아가던 때는 한편 부럽기도 했던 생활.

‘하는 일 없이 놀면서 돌아다니는 사람’ 그 뜻을 가진 ‘발록구니’란 낱말을 놓고 보니 하는 일 없이 놀고만 있는 지금. ‘하는 일 열심히 하면서 때로 멋지게 놀며, 활기차게 다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 잊고 있던 낱말풀이 속에서 찾아보는 똑같은 일상이 주던 행복이 얼마나 감사했던 것인지.

오늘 아침은 이렇게 아날로그적인 것에서 잠시 옛 추억과 작은 여유로움을 찾는다.


김채은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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