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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해동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다. "찌르릉 쮸쁘이" 달리 표현할 길이 막연한 새소리에 눈이 떠졌다. 아침잠을 설쳤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밖은 아직 온통 푸른빛을 머금은 이른 시간이다. 이불 속 몸을 웅크린 채 가만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앙상한 가지마다 연두색 빛이 감돌았다. 며칠 전에 크로커스(Crocus)가 보라색·하얀색·분홍색·노란색으로 피어 나를 놀라게 하더니, 엊그제는 수선화가 피어 가슴이 철렁했다. 수선화들은 무리 지어 노란빛을 가득 머금고 바람 따라 흔들리며 수선을 떨고 있는 모습이다. 누이가 의붓어미 시샘에 죽어 '접동새' 되었다지 아마? 김소월의 시를 읊으며 소곤댄다.

가벼운 아침 식사를 마치고 문밖을 나섰다. 날이 제법 쌀쌀맞다. 옷깃을 여미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철로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섰다. 갑자기 노란색의 개나리꽃들이 흔들거리며 환상처럼 들어왔다. 그리고는 목련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큰 가지는 다 잘려버리고 밑둥만 덩그러니 남았는데, 위쪽으로 잔가지가 그득했다. 잔가지 마다 목련꽃 봉우리가 애처로운 분홍색을 머금은 채 을씨년스럽게 매달려 있다. 다행이다. 일단 날이 풀려 햇살이 거침없이 온 누리를 비추면 봄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것이다.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키스를 퍼부어대는 여인같이 성큼 다가오는 봄은 언제나 두렵다.

강아지 한 마리가 골목에서 겅충겅충 걸으며 나에게 다가온다. 그 발자국 속에도, 줄을 잡아채며 약간 고개를 수그리는 여인의 웃음 띤 표정 안에도 봄은 서려있다. 울새 두 마리가 총총한 걸음으로 잔디밭 위를 달린다. 붉은 가슴을 곧게 세우고 애처롭게 큰 눈을 뒤룩거리며 먹이를 찾는다. 유모차가 지나간다. 어린 아가는 날보고 방긋방긋 봄 햇살처럼 웃는다. 가지들이 뒤엉켜서 촘촘한 키 작은 나무 사이에 참새들이 모여 떠든다. 블루제이(Blue Jay)는 높이 떠 사방을 경계하며 요란한 소리로 "꺅꺅" 댄다. 봄은 아직 서툰 모습으로 엉거주춤 서있다.

꽃샘추위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꽁꽁 언 땅에서 뿌리 깊은 나무들은 겨우 내내 참고 견디었다. 이제 활짝 기지개를 펼 것이다. 푸른 하늘은 구름 몇 점 머금은 채 파스텔 그림으로 꿈처럼 펼쳐져 있다. 그 뿌연 그림 속으로 새들은 날아들고, 바람도 춤추듯 불어온다. 바람의 발길이 사뿐히 닿는 곳. 그곳에 왁스(wax)를 칠해 놓은 듯 번들거리며 노란빛을 들어내는 꽃들이 조용히 피어있다. 그 곁에 있던 다람쥐는 나를 보고 바삐 달아난다. 봄도 인기척을 느끼면 아마 그럴 것이다.



봄은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나의 가슴을 흠뻑 적시고 일 년 써먹을 감성을 심어줄 것이다. 겨울이 아픔이었다면 봄은 희망이고 열정이며 그리운 애틋함일 것이다. 매년 이렇게 봄이 올 때면 나는 심한 가슴앓이를 한다. 잔인하다는 사월의 기억도 다시 찾아온다. 노란빛으로 가득한 뜰만 바라보아도 말이다. 꽃은 자꾸만 피어나고, 가슴은 자꾸만 아파온다. 햇살 가득하고 따스한 봄날이면 빼앗긴 들에서 봄을 맞이하지 못한 한 시인이 그리고 호기심 많고 어른 말 잘 듣던 착한 아이들이 떠오른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고 갈라져 버린 조국의 아픔도 생각난다. 점점 잊혀져 가는 숫자들, 4·3 혹은 4·19. 이렇게 나른하고 황홀하고 아프고 쓰라린 봄이 온다.

봄아! 봄아! 조금 더디 올 수 있겠니? 봄 햇볕이 너무 따갑다.


고성순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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