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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내다 본 창밖, 소나기 퍼붓는 광경에 늦은 오후 나른함이 달아났다. “ 아, 참 좋다.” 가늘게 내리는 비도 좋지만, 굵은 비가 좍좍 쏟아지는 이런 날이 나는 정말 좋다. 십 년 전 즈음의 나였다면, 당장에 차를 몰고 나가 비발디의 첼로 협주곡을 틀어놓고 굵은 빗줄기를 가르며 하이웨이를 달렸을 텐데.

빗줄기에 가려진 사방은 온통 무채색이다. 비 구경하러 마당에 나온 지 몇 초 만에 신발이며 양말까지 흠뻑 젖었다. 장대비는 어느새 물줄기를 이루며 뒷마당 나무둥치를 돌아 갓길 따라 좔좔 흐르고 있다. 빗물 위를 철벅거리며 걷고 있는 내 모습, 내 인생길 어디선가 보았던 모습 같다. 오늘이나 어제나 별 다름없이 사는 이 무덤덤한 초로의 여인에게 소싯적 짝사랑 추억이 갑자기 떠오르다니. 이런 느낌을 ‘데자뷰’라고 했던가.

오늘처럼 비가 억수로 퍼붓던 그날, 나는 한 남자를 미행했었다. 고수머리에 뿔테 안경을 끼고서, 비쓱거리는 걸음걸이로 교실 복도를 지나다녔던 독일어 선생님, 여고시절 나의 짝사랑이었다. 친구들이 제 또래 남학생들과 노닥일 때, 나는 그 선생님 때문에 독일 가곡 ‘Ich liebe Dich’를 달달 외웠고, 코피를 쏟으며 독일어를 공부했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을 들으며 ‘니체’를 뒤적였고, 하이델베르크를 동경했었다.

선생님이 결혼 발표를 했던 방학 날이었다. 맥 빠진 걸음으로 교문 앞을 서성이다가, 왠지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에서 퇴근길 선생님 뒤를 따라 걸었다. 선생님은 광화문 네거리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레코드점 ‘올리버’로 들어갔다. 비바람에 흔들리는 우산을 꽉 움켜쥐고서 나는 길가에 서서 상점 안에서 레코드를 뒤적이는 선생님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내려다본 내 발등 위로는 황토색 빗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고, 아침에 가지런히 접어 신었던 하얀 양말은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때 레코드 가게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던 노래는 ‘Think Twice’ 였다고 생각했었는데, 이 부분은 아마도 후에 내가 첨부해서 날조했던 사항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 이후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지만, 장대비 속에서 검정 우산을 들고 하얀 교복을 입고 서 있던 가랑머리 소녀의 모습은 비 오는 날에 가끔 한 폭의 수채화처럼 나타나 나를 슬며시 웃게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두 해 전이었던가. 어느 날 저녁 ‘춘성’이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엄마 친정집 마름의 아들이었다고 했다. “아버지도 아닌 웬 외간 남자를 갑자기 생각할까, 혹시 엄마 옛날 애인이었나?”라고 물었다가, 혹시 엄마가 잠들기까지 시간이나 때울 요량으로 “마님, 이제라도 회개하시고 속죄함 받으시지요.”라고 놀렸었다.

춘성이는 열아홉 살에 상사병을 앓다가 죽었다. 그의 장례 행렬을 구경하고 있던 엄마 앞에서 장지로 향하던 상여가 딱 멈추었다. 한동안 움직이질 않았다. 춘성이 누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예쁜아, 네 옷가지 하나만 줄래? 우리 춘성이가 여길 떠나지 못하는구나.” 열여섯 살의 엄마는 “ 미쳤어요?” 하고는 집으로 뛰어 들어가 대문을 걸어 잠갔다. 이야기를 마치고 엄마는 “그때 그냥 줘도 됐을걸, 내가 너무 어렸어.” 하고는 소리없이 웃으셨다.

지난날을 되찾으려는 집착만 없다면, 옛일을 그리워하며 산다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다. 아니, 어쩌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아름다운 건지도 모른다. 낙엽이 질 때, 첫눈이 내릴 때, 장대비가 내릴 때, 저 마다의 추억 속에서 그때의 내 모습을 그려 보는 것, 그 낭만을 모르면서 어찌 삶을 즐길 수 있으랴.

빗물이 남겨준 물기 때문에 비온 후 세상의 음영이 더 뚜렷하게 보이듯이,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추억들 때문에 내 노년의 삶이 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이 행여 나만의 착각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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