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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칼럼] 내 삶의 가장 귀한 순간

오랜만에 저녁을 함께하자는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 남편의 일 주년 기일이 곧 다가오는지라, 고인과의 추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나갔다. 씩씩하게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은 그가 식탁 위로 슬며시 올려놓는 종이 가방, 내 생일 선물이 들어 있었다. 내 생일 이틀 후가 그녀 남편의 기일이다. 그 와중에 내 생일을 잊지 않고 챙기다니.

살다 보면 손으로 꾹 눌러야 할 만큼 가슴이 저릴 때가 있다. 절벽 끝에 홀로 선 것처럼 막막했을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려 볼 때가 그렇다. 남편을 떠나보내고 난 후 첫해, 문신처럼 남겨진 남편의 흔적들을 무엇으로 지울 수 있었으랴. 저절로 눈이 떠진 햇살 맑은 아침, 텅 빈 침대 한쪽 끝 모서리를 바라볼 때, 우편함 속에서 고인의 이름이 적힌 우편물을 꺼낼 때, “이제 왔어?” 하는 소리가 사라진 집 안에 내려앉은 정적이 쓸쓸하게 느껴질 때, 가닥가닥 떼어 놓을 수 없이 뭉친 서글픔이 울컥 목울대를 치고 올라와서 꺼이꺼이 목놓아 운 적은 없었는지. 겨우겨우 살이 차오르는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들쑤시는 그리움에 풀썩 주저앉은 적은 없었는지.

살다 보면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때문에 낯선 곳으로 밀려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특히 죽음은 우리네 삶에서 피할 수 없는 실체다. 지난해에 나는 세 사람의 지인을 잃었다. 그의 남편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늘 옆에서 나를 돌봐주었던 사람들, 미래에서도 함께 있을 거라 믿었던 사람들, 이젠 내 일상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관계가 되어 버린 그들을 떠올리니 지금까지 내가 누렸던 이기적인 행복의 온도가 냉랭해지는 느낌이다.

인간사에서 살고 죽은 것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사실이지만, 절대 안정을 취해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는 일이 어찌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만날 때마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섣불리 위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안으로 말을 삼켰었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딱히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마음이란 게 있어 참 다행이다.



상처를 지니고 사는 고된 삶이어도 세월이 약이 될 거라고, 아픔보다는 고인과 함께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살다 보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고 싶은 건 내 이기심일 테지. 삶의 길목 꺾일 때마다 족쇄처럼 발목을 잡아당길 그의 트라우마를 생각해 보니 마음이 무겁다.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면 저절로 극복되는 것이 트라우마라는 생각에 다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후 늦게 할머니 한 분을 모시고 닥터 오피스에 다녀왔다. 벤 트럭을 타고 내리는 게 힘드셨던지 “이렇게 힘들게 이 세상을 더 살면 뭐하겠냐.”고 불평하셨다. 까탈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조그만 증상에도 병원 응급실을 찾고, 조금만 불편해도 의사에게 당장 가야 한다고 독촉하는 할머니의 한탄을 들으며, 젊은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등져야 했던 지인들의 심정을 생각해 보았다.

요즘 유행하는 ‘구구 팔팔 이삼 사’라는 말이 있다. 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자는 의미다. 과학의 발달로 이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죽고 사는 일에 좀 더 담담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 역시 가능한 한 오래 살고 싶다. 하지만 하늘 아래 영원한 것은 없다고 했다.

얼마 전 친구와 함께 밥을 먹다가 배를 잡고 웃었다. 이 좋은 세상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은데, 앞으로 살날이 점점 짧아지는 걸 생각하면 너무 아쉽다는 내 말을 듣고 친구가 정색하며 진지하게 물었다. “천국에서 누릴 영생을 이 세상에서 가불해 살 수는 없을까?”

인간사는 ‘생로사(生老死)’가 아니라 ‘생로병사’다. 그 까닭에 삶에 병(病)이 들면, 애끊는 이별도 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내 삶의 가장 귀중한 순간 ‘지금’을 잘 살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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