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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구약 성경 번역자 남가주에 묻혀있다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 박준서 교수 인터뷰

남가주 알타데나 '마운틴뷰 묘지'
찾는 이 하나 없이 방치된 묘소
풀러신학교와 공동으로 제막식 준비
내달 1일 묘소 앞 기념 동판 설치
한국 남포교회가 헌금으로 지원해


요즘 한국 최초의 구약 성경 번역자를 역사적으로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미주 한인교계에서 가속화되고 있다.

내달 1일 알타데나 지역 '마운틴뷰 묘지(Mountain View Cemetery)'에서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 기념동판 제막식이 진행된다. 풀러신학교 코리안 센터와 한국의 '피터스 목사 기념사업회'가 이번 제막식을 공동으로 주관한다.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한국명 피득ㆍ1871~1958) 목사는 기독교 역사학계에서 '잊혀진 구약성경 최초의 번역자'로 불리고 있다. 한국 기독교에서는 신약 성경을 최초로 번역한 존 로스(John Ross) 목사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구약 성경을 번역했던 피터스 목사에 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지난 2016년 박준서 연세대 명예교수가 마운틴뷰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직접 찾아내면서 교계에서는 구약 성경 최초 번역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박 교수가 찾아낸 피터스 목사의 묘소는 찾는 이 하나 없이 수풀이 우거진 채 방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진행되는 기념동판 제막식은 피터스 목사의 공적을 기독교 역사학적으로 재조명하는 첫걸음이다. 박 교수가 직접 전하는 피터스 목사에 대한 공적을 글로 옮겨본다.



피터스 목사는 최초로 구약 성경을 한글로 변역한 분이다.

어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던 그는 1895년(당시 24세)에 한국으로 왔다. 피터스 목사는 쪽복음(단편으로 인쇄된 성경)을 팔면서 한국말을 익혔고 62편의 시편을 한글로 번역해 '시편촬요(1898년)'을 출판했다. 이 때문에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구약성경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게 됐다.

이후 피터스 목사는 구약성경 번역 위원으로 개역 작업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 1938년 개역 구약성경을 완성시켰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구약 성경은 피터스 목사가 완성한 구약개역성경을 표준 맞춤법에 따라 수정한 것이다.

그는 본래 러시아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심해 그는 러시아를 떠나게 됐고 결국 일본 나가사키에 정착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알버터스 피터스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 개종을 결심했다. 그때 자신의 유대식 이름(이삭 프룸킨)에서 자신에게 세례를 준 피터스 목사의 이름을 따라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로 개명을 하게 된다.

또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가 청년이었던 피터스를 권서(colpoteur) 자격으로 한국에 파송하게 된다.

피터스는 히브리어 뿐 아니라 라틴어, 희랍어와 같은 고전어 뿐 아니라 러시아, 독어, 불어, 영어, 이디쉬어(yiddish)까지 구사하는 어학의 귀재였다.

이처럼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타고난 피터스는 한국에 온 지 불과 2년 만에 한국어를 익혔다. 그때부터 피터스는 평소 애송하던 시편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 통 47장)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 통 433장)의 가사 역시 그가 시편 67편과 121편을 번역한 것을 찬송가 가사로 운율화한 것이다.

피터스는 잠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맥코믹(Mccormick) 신학교를 졸업한 뒤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04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성경번역위원회에서 구약 성경 번역에 참여하게 됐다.

1941년 피터스 목사는 70세가 되어 은퇴할 나이가 됐다. 그는 성경번역자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46년 동안 봉사했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이후 패서디나 지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87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기념 사업을 하게 된 계기는.

"나는 구약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피터스 목사가 최초의 한글 구약 성경 번역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말년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이는 한국 교계나 신학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풀러 신학교에서 방문 교수로 지내면서 알아본 결과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마운틴뷰 묘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는데 잡초와 잔디로 뒤덮여 있는 피터스 목사의 묘지를 보게 됐다. 그렇게 초라하게 방치돼 있다는 사실에 놀랄수 밖에 없었다."

-피터스 목사는 왜 한국교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나.

"그 이유는 솔직히 잘 모른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잊지 않고 감사하는 선교사들은 대개는 학교, 대학, 병원 같은 기독교 기관을 세운 분들이다. 그분들이 세운 기관들이 성장하고 발전함에 따라 그분들의 이름도 한국에서 익숙한 이름이 됐다. 그런데 피터스 목사와 같이 성경을 번역한 분은 쉽게 잊혀졌던 것 같다. 피터스 목사 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서 도왔던 이원모 장로, 레이놀즈 선교사 같은 이들도 한국교회가 잊어서는 안 될 인물들이다."

-기념동판 제작 배경은.

“현재 피터스 목사의 묘소는 잡초와 잔디로 뒤덮여 방치돼 있다. 이 소식을 듣고 한국 서울에 있는 남포교회에서 박영선 원로 목사와 최태준 담임 목사님을 비롯한 온 교회 성도들이 헌금으로 도와줘서 기념동판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또 기념동판 제막식 행사를 공동 주관하도록 풀러신학교와 코리안센터 측에서도 도와줬다.”

-향후 다른 기념 사업은.

“내년에는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피터스 목사 기념비를 세우려고 한다. 양화진에는 결혼생활 4년이 되기 전 33살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신 피터스 목사의 첫 번째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의 묘지가 있다. 이후 재혼을 했던 의료 선교사 에바 필드의 묘소도 양화진에 있다. 장기적 계획으로는 피터스 목사의 묘소를 미국으로부터 양화진으로 이장하는 것도 구상 중이다. 또 피터스 목사의 전기도 출판하고 곳곳의 산재돼 있는 자료를 찾아내려고 한다. 또 피터스 목사 기념강좌 등도 풀러 신학교와 협의해 개최하려고 한다.”

-교계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받은바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한국교회는 피터스 목사를 한국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이 이룩한 공적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피터스 목사의 헌신적 삶을 기리고 감사하는 기념사역에 교회와 성도 모두가 동참해 주기를 바란다.”

☞박준서 명예교수는

서울대학교(법과대), 연세대학교(신과대), 예일대학교(목회학), 프린스턴대학(구약학) 등을 졸업했다. 이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학 부총장 등을 거쳐 경인여자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또 한국 구약학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구약개론, 성서세계의 이해 등의 저서도 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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