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40년만에 돌아가 고아들의 엄마가 됐다

여자 전사들: 거리의 천사 송정윤(상)

사진신부 출신 송정윤은 1950년대 테레사 수녀처럼 단신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에 돌아갔다. 그녀는 40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가 다시 조국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간 된 조국에는 고아와 거지가 넘쳐났다. 그녀는 그들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킨 거리의 천사가 되었다.

구제와 교육에 온전히 삶을 바친 송정윤의 이야기는 그의 회고록, 그리고 아들 알프레드 송과 손녀 레슬리 송의 이야기를 종합했다. 레슬리 송은 2012년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5년 만에 할머니의 양아들인 한남고등학교 박세원 교장과 만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할머니는 박 교장, 그리고 그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살았다. 아마 박 교장이 나보다 할머니에게는 더 가까운 가족이었을 것이다. 박 교장은 할머니를 어머니로 불렀고 박 교장의 딸 미경은 할머니라고 불렀다. 박 교장은 나의 아버지를 '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와 무척 가까웠다. 1943년부터 1957년까지 할머니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을 때 우리 가족과 함께 지냈다. 나는 2층 다락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잤다.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성경책을 항상 읽었고 어느 날 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니?"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내게 한 이 질문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할머니의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35년 동안 80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하남 근처의 땅을 구입해 고아원을 설립할 때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와 편지를 주고 받는 횟수가 뜸해졌다. 가끔 아버지로부터 할머니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가 할머니를 방문해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방문한 학교에는 큰 예배당과 교실이 있었는데 40년이 넘은 교실 건물은 너무 낡아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 곳에서 공부하고, 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자 나 또한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저녁도 학교 식당에서 먹었다.

한국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나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흩어진 한국인들의 시작과 근본은 바로 이곳, 한국이었다. 한국처럼 지난 수십년 동안 엄청나게 발전한 나라가 있을까? 할머니도 바로 한국의 기적이 가능하도록 기여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한국 사람이었고, 보통 한국인들처럼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버지가 가나안 기독학교를 설립하고 비영리단체로 등록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고, 할머니 역시 기업의 기부금이나 기금 모금 없이 개인 독지가의 도움만으로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7년에 할머니는 기부받은 어린이 옷들을 가득 싣고 한국에 다시 돌아가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동안 할머니는 미국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1965년이 할머니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1991년 할머니는 양아들인 박 교장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같이 너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6절)

송정윤이 1991년 93세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24쪽의 회고록에 쓰여 있는 내용이다.

나는 1897년 대구에서 김정윤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14년 사진신부로 한국을 떠나면서 부산에서 아버지와 작별했는데, 그 후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다. 당시 17세였던 나는 일본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고 배를 타고 태평양의 파도를 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상상했다. 한번도 가본 적 없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배를 타고 며칠을 갔을까. 드디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이민국 직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 10월 21일 목사님의 성혼 선언과 함께 나는 송진구의 아내가 됐다. 그후 나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왔다. 새로운 의무가 많이 생겼고, 시부모님과 남편 형제들과 한집에서 생활했다.

1919년 2월 16일 맏아들 알프레드 호연이 출생했다. 그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시작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만큼 자랐을 때, 동생 퍼시 호성이 1921년 6월 12일에 태어났다. 퍼시는 내가 임신 중 건강이 좋지 못해서인지 알프레드처럼 건강하지 못했다. 나는 자궁 절제 수술로 휴식이 필요해서 퍼시를 시골에 있는 시누이 집으로 데리고 갔다. 퍼시는 성장이 좀 더뎌 형보다 늦게 걷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좋아했고 어릴 때부터 성경을 잘 암송했다.

알프레드는 다섯살에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러나 퍼시는 성장이 더디어 여섯살에야 겨우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알프레드와 퍼시는 일요일이면 호놀룰루 4가에 있는 감리교회에 나가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퍼시는 한문도 배웠고, 프리츠 목사처럼 한국에서 목회를 하는 꿈을 키웠다. 집에서도 퍼시는 언제나 성경 구절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지만 알프레드는 학교나 교회에서 꼭 필요한 수업만 듣는 편이었다. 알프레드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밖에서 게임하는 것을 더 즐겼다. 두 아들 모두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특히 알프레드는 우등생이었다. 퍼시가 9학년 때 그 아이는 마태복음 6장 19~21절을 항상 명심하며 지냈다. "너를 위해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그것은 없어질 수도 있고 누가 훔쳐 갈 수도 있다. 천국에 보관하면 보물은 영원히 빛날 것이며 누가 훔쳐 갈 수 도 없다. 보물이 천국에 있다면 네 마음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퍼시가 어린 마음에도 하느님 말씀을 유념하고 지낸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느님이 퍼시에게 통찰력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던 것 같다. 아마도 퍼시를 갑자기 데려가시기 위해 미리 준비하셨던 것이 아닐까.

어느 더운 여름 퍼시가 맨발로 다니다가 날카로운 것에 발을 찔렸는데 그만 파상풍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파상풍은 치료하기 힘든 병이었다. 그 아이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은, "엄마 걱정하지 마. 나는 이겨낼 거야"였다. 그리고 1934년 12월 8일 숨을 거두었다. 퍼시가 세상을 떠난 후 2주 동안 나는 그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뭔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고민했다. 드디어 나는 고민의 답에 도달했다. 퍼시가 원했던 것처럼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내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노래로 가득했다.

문득 퍼시가 학교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돈을 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하느님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것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퍼시는 친구가 없는 아이들과 항상 함께 놀아주었으며,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가족들은 퍼시 때문에 더 이상 울지 않는 나를 보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나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하느님을 섬기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다음 해 알프레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 진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남편은 트럭 운전사로 일했기 때문에 아들의 대학 학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알프레드의 학비를 벌기 위해 나는 가정부로 취직했고 알프레드도 나와 함께 그 집에서 생활했다. 2년 동안 알프레드는 시립 도서관에서 일했다.

알프레드는 하와이 대학교에서 2년을 공부하고 남가주대학교(USC)로 전학했다. 남가주대학교는 사립대학으로 학비가 매우 비쌌다. 그런 비싼 대학을 어떻 게 다닐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무릎을 끓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염려 말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걱정하지 말라."

그 다음 일요일 나는 친구들에게 알프레드가 남가주대학교로 전학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들이 내 주머니에 돈을 찔러넣기 시작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집에 와서 돈을 세어보았다. 알프레드와 내가 본토까지 갈 수 있는 뱃삯과 첫 학기 학비까지 낼 수 있는 금액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알프레드가 본토의 남가주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정리= 장병희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