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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수다 떨기의 원칙 몇 가지

병동 입원환자 중에 성미 고분고분한 젊은 놈이 하나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걸면 어김없이 랩(rap)으로 대답한다. 흑인 악센트가 팍팍 들어가는 리듬감으로 쌍소리가 곧잘 튀어나오는 그의 즉흥 랩은, 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지속되는 특징이 있다.

나는 그 분열증 환자의 순발력에 깊이 감탄하면서 흐치흐치, 치커붐! 하며 랩에 합세하여 변죽을 울리고 싶다. 야, 너 또 랩 하냐, 하면 피식 웃으면서 내게서 얼른 줄행랑을 치는 아주 이상한 놈이다.

할아버지 제삿날 우리 집에 들리던 먼 친척 '떠버리 아저씨'가 생각난다. 여자들은 생선전을 부치면서 수군수군 수다를 떨지만 떠버리 아저씨는 한잔 거나하게 드신 얼굴로 아무나 붙잡고 큰 소리로 쉬지 않고 혼자 떠드신다. 그의 대화법은 독백에 가깝다. 자신은 여의치 못했지만 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그의 훈시보다 아낙네들의 수다에 훨씬 더 관심이 쏠렸던 내 어린 시절이었다.

수다를 떨 때 몇 가지 원칙이 있어야 좋다고 생각한다. 첫째, 상대와 여러 모로 수준이나 취향이 같으면 수다 떨기가 쉽다는 것. 동류의식이 수다 떨기에는 최고로 적합한 상황이다. 그 친척 아낙네들은 간간 누군가를 흉보면서 깔깔 웃었다. 공동의 적을 가진 사람들끼리 수다 떨기가 짜릿한 법이려니.



둘째, 수다를 떠는 인원 수가 적을수록 좋다. 수다는 껄렁한 그룹 테라피처럼 너무 여럿이 한꺼번에 떠들어 대면 실효성이 슬금슬금 감소한다. 우리는 사회적 동물인지라 머리 수가 많으면 편이 갈리고 파벌이 생기고 패싸움이 벌어진다. 수다를 떠는 제일 좋은 상황은 1대1, 단 둘이서 떨 때다. 세련되고 고즈넉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정신상담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남녀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의 공감대는 1인칭과 2인칭 사이에 생기는 접속이 가장 경사스럽다. 'you and I'의 수다 떠는 현장에 'he, she, it' 같은 3인칭, 그리고 'we, you' 같은 복수(複數)가 찬물을 끼얹는다. 또 있다. 3인칭 복수. 저 신원불명의 무서운 패거리 'they'! 너절한 삼각관계, 허접스러운 연설문, 치사한 성명서 같은 시츄에이션에서는 도저히 수다를 떨지 못한다. 그러나 시인은 시(詩)에서 수다를 떤다.

셋째, 수다를 떨고 싶은 사람들은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겠다. 한쪽은 한가롭지만 다른 쪽이 눈 코 뜰새 없이 바쁘다면 수다 떨 기회조차 없다. 아무리 바빠도 애써 시간을 만들라고? 그러면 누구와 수다를 떠는 일도 미리 일정을 잡아야 된다는 스트레스가 생기는 걸.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에 할머니가 사시던 본적지에 갔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초가집에서 혼자 살고 계셨고 하늘에 별무리가 흐드러지는 시간이면 으레 마을 사람 한둘이 '마실'을 왔다. 표정이 어두운 할머니는 그들과 수다를 떠실 때 자주 웃으면서 즐거워하셨다.

영어에는 수다를 떤다는 말에 딱히 해당되는 단어가 없다. 기껏 'shoot the breeze(산들바람을 쏘다?)'가 있지만 영 싱겁기만 하다. 'chat' 또는 'chit-chat'도 있지만 마찬가지. 수다 '떨기' 같은 어휘에서 오는 떨림, 울림, 전율처럼 왈칵 자지러지는 공감현상이 없다.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 어린애가 재롱을 '떨'거나 늙은이가 궁상을 '떨' 때 당신을 확 사로잡는 생생한 기쁨이나 동정심에 대하여.

떠버리 아저씨와 친척여자들의 안쓰러움과 고단한 정서를 무마시키고, 내 환자의 소외감을 덜어주고, 직장에서 못마땅한 일을 당했을 때 친한 동료가 절절한 동류의식으로 내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까마득한 옛날 할머니의 외로움을 달래준 유효 적절한 정신치료법이 바로 수다 떨기였다. http://blog.daum.net/stickpoet


서 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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