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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당 구계순 ‘사군자’ 진경문화 후계자

“사군자는 철학과 예술이 만나는 심오한 세계입니다. 인간 본성(마음)의 원리를 추구하는 성리학을 예술로 승화한 것이 사군자다”




조선 ‘성리학’의 사상적 기초 위에 시·문·서·화가 조화를 이룬 조선 ‘진경문화’의 꽃을 피운 삼연학파의 마지막 직계 제자인 ‘하당(荷堂) 구계순’ 선생이 들려준 사군자의 매력이다.






하당에 따르면 대나무는 인간 본성의 절개와 강인함을 뜻하고, 난초는 거름을 싫어하고 고결한 뜻을 간직하고 있다. 매화는 눈보라를 감내하며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뜨리는 인내를, 국화는 늦가을 찬 서리가 내려도 꽃을 간직하는 끈기를 상징한다.




이민생활 17년간 묵묵히 사군자를 치며 문을 닫고 지낸 ‘하당’ 선생이 태평양 너머 캐나다에서 후계자들을 양성하고, 동포와 주류사회에 사군자의 고고한 화풍을 알리는 걸음을 걷고 있다는 소식에 무작정 만남을 요청했다.




구계순 선생의 호 ‘하당(荷堂)’은 ‘연꽃 집’이란 뜻으로 진흙탕에서도 더러움을 타지 않고, 깨끗한 물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솔직한 연꽃의 성품을 닮았다며 스승이 지어준 호다.




기자가 하당의 자택을 방문한 날, 그는 폭과 넓이가 1m를 넘는 한지 위를 걸어 다니며 왕죽(큰 대나무)을 치고 있었다.




굵기와 키가 각기 다른 다양한 붓들이 벼루 옆에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었다. 외부인 앞에서는 작품을 하지 않는다는 하당을 졸라 왕죽이 완성되는 장면을 지켜봤다. 햇빛을 받은 듯 투명한 나뭇잎과 그늘진 마디, 힘차게 뻗은 왕죽 옆에 땅을 갓 뚫고 나온 듯한 어린 대나무 가지들이 한지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라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 속에서 작품을 완성한 하당은 “인간 본성을 사색하며 사군자를 치는 과정은 곧 마음의 수양이다. 사군자의 대작을 그릴 때는 온 정신과 육신과 혼이 일치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이라며 붓을 내려놓았다.




선비의 지조와 기개를 표방하는 매화·난초·국화·죽(대나무) 사군자와 40여년을 함께 한 하당 선생의 모든 것을 알아봤다.



(평범한 주부의 껍질을 깨고)



경남 창녕 출생의 하당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대학 도서관 사서로 근무했다. 책 속에 묻혀 있었지만 그녀는 손톱에 매니큐어 칠하기를 좋아하는, 유행의 첨단을 걷는 아가씨였다. 직장생활 6년 만에 법률연구실 연구원이던 남편과 결혼해 종갓집 맏며느리로 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이 대기업 임원으로 바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녀는 2남2녀를 낳아 키우며 10년을 보냈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모험을 좋아했던 젊은 아낙은 집안에만 있는 시간이 지루해졌고, 문득 ‘나는 무엇인가. 한평생 한 남자의 아내, 아이들의 엄마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회의가 들었다.




어릴 때부터 미술솜씨가 빼어나 종종 교실 뒤편에 작품이 내걸렸던 그는 그림에 대한 향수로 서울 성북동의 ‘간송미술관’을 자주 찾았다.




간송미술관은 한반도의 문화재가 일본으로 무더기로 유출되던 일제강점기 때 사재를 털어 우리 문화유산을 지켜낸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이 세운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다.




국보 12건, 보물 10건, 서울시 지정문화재 4건을 포함해 김정희, 정선, 심사정, 김홍도, 장승업, 신윤복 등 조선시대 주요 화가들의 서화, 서책, 고려 및 조선의 자기, 석탑과 불상 등으로 ‘민족 문화유산의 보물창고’로 불린다.




여러 전시회들 중 특히 사군자에 매료된 그녀는 한국 민족 미술을 연구하는 간송미술관을 통해 사군자의 역사적 정통을 이어받은 옥봉(玉峰) 조기순 스님을 알게 됐다. 당대 최고의 대가에게 사군자를 배우겠다는 마음을 세운 그녀는 1970년 옥봉 스님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사군자의 역사적 고찰)





조선 초기 유입된 중국 원나라의 난죽화풍(蘭竹畵風)은 조선 중기에 명(明)나라 화풍이 새로 들어오면서 조선 고유의 미감이 발현된 난죽화 양식으로 발전한다.




조선 중기에 삼연(김창흡) 학파는 조선성리학의 사상적 기초 위에 시, 문, 서, 화(時·文·書·畵)를 더한 조선 고유의 진경문화(眞景文化)를 꽃피우고 조선난죽화를 이끌었다.




조선 말기에는 추사 김정희가 청(淸)나라 난죽화풍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의 고증학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문인(文人)화풍을 창안한다. 석파 이하응(대원군)도 추사학파의 한 사람이다. 추사학파는 그러나 구한말의 역동적인 시대적 변화 속에서 후계구도를 잇지 못했다.





반면 조선중기 진경문화의 주도자인 삼연학파의 마지막 계승자인 의암 유인석은 서구식 제도 개혁인 갑오경장에 반대해 항일 의병을 일으켰다. 유인석의 제자인 일주(一洲) 김진우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으로 항일투쟁을 하면서 한편으론 일제치하 조선 미술전시회를 통해 진경문화의 사군자의 맥을 이었다.

생존 사군자의 대가 옥봉 조기순





일주 김진우의 유일한 제자인 옥봉 조기순은 일주의 명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옥바라지를 했으며, 서대문형무소의 한룡운, 여운형, 홍명희 선생 등의 연락책을 맡고, 개성의 김정호, 함북군성의 서정관 씨 등의 자금조달역을 맡았다.




정통사군자의 맥을 전수받은 옥봉은 일제치하인 1935년 조선서화협회전 특선을 시작으로 해방 후인 1951년 대전문화원 초대전, 대구미공보원 초대전, 1952년 청주문화원 초대전을 열었다.




1954년 출가해 동학사에서 수도하며 1961년 심향 박승무, 남농 허건 화백과 합작전시회를 열었고, 동학사 주지로 취임한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전국에 걸쳐 전시회를 열었다.




1977년 대만 진림 화백의 초청으로 전시회를 열면서 그 작품 일부는 화강박물관에 영구 보존되고 있다. 1991년 5월 간송미술관이 일주의 유작발굴과 그 제자인 옥봉의 작품을 한데 모아 연 전시회가 일간지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를 계기로 옥봉은 한국사군자의 정통한 맥을 이어받은 일주의 유일한 생존 제자 작가로 만천하에 선언됐다.



(난초와 10년을 씨름하다)





옥봉 스승은 1970년 배움을 청한 제자에게 가타부타 답을 주지 않았다. 진중한 뚝심을 지닌 제자는 포기하지 않고 몇 개월을 꾸준히 찾아다니며 정성을 보였다. 1971년 2월 드디어 스승의 입에서 “내일부터 붓과 먹을 가져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대쪽같은 성품의 스승은 몇 개월간 시간을 두고 하당이 사군자 예술을 이어갈 끈기와 정신이 있는지 유심히 관찰했던 것. 취미로 붓을 놀리는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예술인으로 키울 재목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쉽게 제자를 거두지 않는 옥봉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청와대의 육영수여사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통해 가르침을 청했으나 일언지하에 사양했다. 영부인은 이후 박순천 여사(전 민주당 대표)를 보내 다시 배움의 의사를 전했으나, 스님은 “법복을 펄렁거리며 청와대를 들락거리라는 말이냐‘며 거절했다.




배움의 길은 참으로 길고도 어려웠다. 하당은 10년 세월을 난초 하나만 치며 보냈다. 난초 채본을 던져준 스승은 제자의 긴 수련을 모른 체 했다. 어느 날엔가 하당이 “매, 난, 국, 죽을 8개월 기간으로 가르치는 곳이 있다”고 하자 스승은 “그것은 영업이지 무슨 예술이냐. 난초 하나라도 제대로 치라”며 호통을 쳤다.




스승의 노성에 혼쭐이 난 하당은 이후 묵묵히 난초를 치며 답답한 심정을 달랬다. 10년쯤 후 제자의 난초를 본 스승이 마침내 대나무 채본을 건넸다.




제자의 오랜 인내를 지켜봐온 스승은 “난초는 사군자의 기초다. 필력이 축적되어야만 대나무를 칠 수 있다. 이 고비를 넘기면 대나무는 그렇게 긴 세월이 걸리지 않는다. 고비들을 뛰어넘어야만 난초는 누구, 대나무는 누구라고 할 수 있는 경지까지 가게 되는 것이다”고 격려했다.




하당 스스로도 이것을 인정한다. 하당은 “난초로 키워온 필력 때문에 대나무를 치는 데는 그리 많은 세월이 지나지 않았고 고생도 하지 않았다. 답답한 세월을 견디며 걸어온 길이 옳았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다”고 말했다.





(한문(漢文) 스승 심당 김제인(心堂 金齊仁)



심당 김제인은 ‘연꽃 집’이라는 뜻의 ‘하당(荷堂)’ 호를 지어준 한문 스승이다. 옥봉 스님의 사군자 문하생으로 입문하고 5년쯤 후인 1976년 5월 하당은 오체천자문(五體千字文)의 전서를 쓴 당대명필인 심당에게 한문을 사사했다.




전문분야에서 최고의 대가로 평가받는 옥봉과 심당의 인연도 독특하다. 심당의 스승은 조선 궁궐에서 왕족들에게 글을 가르친 학자의 제자로 옥봉 스님에게 낙관을 가르친 분이다.




하당이 심당의 문하생이 되고 싶다고 하자 옥봉은 “심당이라면 배울 만 하다”고 흔쾌히 동감하며 실력을 인정했다. 심당은 전서체(篆書體)로 명성이 높으나, 하당은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며 작품에 행서(行書)로 글을 쓴다.




(일본 국제전시회 수상)



사군자를 배운 지 13년 되는 1984년 하당은 일본 국제문화교류전에 작품을 출품해 특선을 받고, 1986년에는 일본 동화신문사 40주년 기념 공모전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한국미술대전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당은 “심사위원들이 돈을 받고 미리 수상작을 정하는 국전의 부정은 이미 여러 차례 일간지에 보도됐었다. (나한테도) 대상을 줄 테니 돈을 얼마 달라는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동화신문사 공모전 당시 옥봉 스님은 “일본은 타국인에게 대상이나 금상은 주지 않으니 기대는 하지 말라”고 했고, 하당은 1986년과 1987년 응모에서 동상을 수상했다. 1988년에는 동화신문사 초대작가로 위촉됐다.



(갑작스러운 토론토 이민생활)



대기업 임원이던 남편이 1990년 초 토론토 지사장에 임명되면서 이민수속을 밟았다. 영주권을 기다리는 2년 동안 토론토에 집을 마련하고, 2남2녀 자녀의 학교를 옮겼다. 그러는 중간에 토론토 지사 건이 백지화됐으나, 그때는 이미 토론토에 터전을 잡은 뒤였다.




1992년 1월 영주권자로 본격적인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하당은 “나야 한국에서 활동하는 것이 훨씬 수월했지만, 이곳과 미국에서 공부를 시작한 아이들 때문에 결국 주저앉았다”며 웃는다.




이민 후 토론토에서 묵묵히 사군자를 치면서 한편으론 한국을 오가며 작품 활동을 했다. 오랜 세월 묵향과 호흡하는 사이 인간의 본성과 그 이치가 사군자에 발현되는 이치를 깨달았다고.




(2002년 스승의 필랑을 물려받다)





자를 멀리 캐나다로 떠나보내면서 절절한 사랑의 편지를 써주던 스승은 90세 되던 해인 2002년 4월 하당을 불렀다. 노구에도 불구하고 붓만 잡으면 꼿꼿했던 옥봉 스님은 “이제 나는 붓을 놓는다. 너만 믿는다”며 붓과 벼루 등을 담은 필랑을 물려주었다.




하당은 당시를 회상하며 “기쁜 마음으로 필랑을 들고 절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마음이 먹먹해왔다. 스승의 연로하심과 사군자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에 한동안 하늘만 바라봤다. 더 열심히 하라는 큰 채찍으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2003년 한국에서 초대 전시회)




사군자를 배운 지 30여년이 된 2003년 6월 창녕문화원으로부터 사군자 전시회 요청이 왔다. 제자의 매·난·국·죽 작품을 꼼꼼히 심사한 스승의 허락이 떨어졌다.




옥봉 스님은 “자기 그림이 남의 벽에 걸리게 되려면 수수만봉의 봉우리와 가지를 치고 수수세월에 걸친 혼이 담겨야 한다. 이제는 그 길을 혼자 걸어가라”고 격려했다.




진경문화를 계승한 삼연학파 후계자로 옥봉 스님 외에 사군자 4개 작품을 모두 전시한 사람은 하당이 유일하다. 옥봉의 다른 제자인 한영희 씨와 유명수 씨는 지금도 세상에 나서지 않고 서울에서 묵묵히 사군자를 치고 있다.




초대전시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하당은 토론토로 돌아와 또다시 묵묵히 사군자를 쳤다. 2007년까지 이민생활 17년간 문을 닫고 지낸 것은 스승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옥봉 스님은 “어설피 남 앞에 나서지 마라. 경지에 오를 때까지는 묵묵히 세월을 쌓아라. 그리고 나서 자기 작품에 책임질 수 있을 때 나서라”고 당부하셨다.


(2008년 토론토 전시회)





이민생활 18년에 접어든 2008년 하당은 문득 절박한 심정이 들었다. 나이가 벌써 70 중반을 넘어섰는데, 정통 사군자의 맥을 이어오신 스님의 제자로 그 맥을 다음 세대에 이어주지 못한다면 스승에 대한 의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하당은 드디어 문 밖으로 발을 내딛기로 작심했다.




그동안 캐나다에서 그려온 작품을 한 아름 안고 한국의 스승을 찾았다. 제자의 심경에 동감한 스승은 작품을 꼼꼼히 검수한 후 “이제는 네 집을 지어라. 너만 믿는다. 고맙다”고 했다.




2008년 4월 토론토총영사관 갤러리에 하당의 사군자 작품 50여점이 전시됐다. 폭 70cm에 높이 202cm의 난초에서 83x138cm의 왕죽, 64x75cm 매화, 38x38cm 국화 등 대작 일색의 사군자 전시회는 관람객들을 매료시켰다.




당시 전시회장에서 어떤 사람은 “집안의 가보로 삼고 싶다”며 난초 앞을 떠나지 못했고, 어떤 이는 “대나무의 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다. 그림이 살아있다”며 감탄했다.




하당의 그림은 팜플렛에 담긴 복사본으로도 충분히 매력을 발산한다. 우연히 책자를 본 뉴욕의 한 미대 교수는 “벽에 사군자 그림을 구워 붙이고 싶다”며 공동작업을 제안했다. 책자로 그의 작품을 본 많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뉴욕에 살고 있는 하당의 큰 딸이 컴퓨터로 뽑아낸 어머니의 사군자로 만든 탁상용 캘린더는 실용과 예술성을 겸비한 작품이다. 하얀색의 작은 액자에 담은 난초와 대나무의 복사본은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깨끗하고 간결한, 그러면서도 이국적인 정취를 물씬 풍긴다.




(토론토에서 제자 양육)





총영사관 전시회 이후 OCAD 미대생들이 배움을 청해왔다. 캐나다에서 자란 한인 젊은이들의 우리 문화에 대한 갈망이 의외로 높았다.




하당은 “사군자 문화의 진수를 참되게 전수시켜야겠다는 생각에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미대생 특유의 감각에다 새로운 분야에 대한 열정으로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고 칭찬했다.




신세대 제자들은 스승의 자질을 테스트하는 발칙함과 서구식 영리함을 갖췄다. 하당은 현재 OCAD 학생 5명과 일반인 4명에게 전통을 전수하고 있다.




하당은 “난초만 10년을 친 나는 구식이다. 긴 세월 한 우물만 파는 방법으로는 현대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 각자의 능력에 맞춰 채본을 제공하고, 요점을 찍어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캐나다와 미국에 한국의 정통 사군자를 널리 알리고 그 맥을 잇겠다는 하당의 비전은 성공적인 결말을 향해 진행되고 있다.


(장밋빛 결실을 기대하며)





하당은 유달리 배움에 욕심이 많다. 한국에 여성 운전자가 별로 없던 시절에 자동차 운전대를 잡고 시내를 돌아다녔고, 한 번도 타 본적 없는 자전거의 패달을 무작정 밟았으며, 30대 중반에 요가를 배워 지금까지도 건강유지의 비결로 삼고 있다.




1970년대 최고의 스승들에게 사군자와 한문을 배우면서 한편으론 꽃꽂이를 7년간 배워 이후 꽃꽂이 연구사범으로 서울의 호텔 등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민 후에는 서양화에도 도전했다. 3년간 배운 실력으로 그린 하당의 서양화는 미대 중견 교수가 놀랄 정도의 실력이다.




작년부터는 일본문화원에서 수묵화 강의를 듣고 있다. 손수건만한 크기의 일본 수묵화는 한지 위를 걸어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하당에게 ‘장난’ 수준이지만, 농담의 묘미가 그윽해 매주 한번씩 연구반에 출석하고 있다.




하당은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한다. 젊은 사람들이 시간을 죽이며 지내는 것이 가장 안타깝고 아깝다. 인생 최고의 스승인 책을 가까이 하면서 자기계발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제자양육으로 한국 사군자 알리기의 행보를 시작한 하당은 현재 스카보로 시청 전시회와 뉴욕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사군자 진경문화 삼연학파의 마지막 제자로 북미주에 사군자의 멋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장밋빛 결실을 맺길 기대하며 응원한다. 하당 연락처:(416)398-5307, hadangkoogyesoon@gmail.com



(오미자 기자 michelle@joongangcand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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