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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맥 칼럼]피난시절과 한강의 기적

6.25 피난시절, 저는 ‘금정피난국민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때 나는 열한 살이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는 나를 학교에 데려가 4학년에 입학시켰죠.

이 곳은 서울에서 다니던 학교와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적어도 학교라면 교사(校舍)와 교실, 책상, 걸상이 있어야 하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는 노천(露天) 교실이 전부였어요. 산자락을 깍아 평지를 만들어 여기저기 세워 놓은 칠판만 보일 뿐입니다. 공부가 시작되면 학생들은 칠판 앞에 모여, 제각기 앉을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노천교실이라 비가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1.4 후퇴 피난을 나는 동래온천장 변두리로 갔습니다. 부산에서 전차와 기동차를 타야 가는 곳이죠.

다행히 동네 초가집 사랑방을 얻어서 우리 온 식구가 한 방에서 오물조물 살았습니다. 남들에 비하면 그것도 큰 행운이었죠.


어느 날 학교에 가니 깜짝 놀랄 일이 생겼어요. 운동장에 커다란 텐트가 우뚝 서있는 거얘요. 천막교실이래요. 텐트 속 칠판 앞에는 빈 쌀가마니가 나란히 놓여있어 우리는 그 위에 털석 앉아 공부했습니다.
공부 하다보면 궁둥이가 조금씩 뜨뜻하게 젖어옵니다. 땅의 물기가 슬슬 가마니를 통해 올라온 것이죠. 수업시간이 끝나, 일어나면 모두의 궁둥짝에 둥그런 원이 하나씩 그려져 있었습니다.

얼마있다가 또 풍금이 들어왔습니다. 모두 얼마나 기뻐했는지요. 풍금에 맞추어 배운 노래는 주로 행진곡 군가였지만, ‘나의 살던 공향’이나 ‘아 목동아’ 같은 노래도 배웠습니다. 풍금반주에 맞춘 우리 노래는 계곡 멀리 구석구석 퍼져 나갔습니다.

학교가 끝나 집에 가는 길에 학생들이 꼭 지나가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동식 노천(露天) 이발소죠. 웃음띤 얼굴에 수염이 듬성듬성 난 아저씨가 이발사였습니다.
그 옆에는 나무 의자, 물 양동이, 그리고 나무 상자가 놓여 있습니다. 상자 속에는 바리깡과 기타 몇몇 이발 기구들이 들어있었죠. 가끔 엄마는 싫다는 나를 강제로 그 의자에 앉히고 머리를 깎게 합니다. 많이 아팠어요. 바리깡의 날이 무디어서 머리의 반은 깍이고, 반은 뽑히는 것 같았거던요.

전쟁이 끝나고 우리 식구는 환도하여 옛 우리집에 왔고 학교도 전에 다니던 돈암국민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는 경복중학교에 입학해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별안간 종이 울리고 우리 모두는 운동장에 나가 정렬해 섰습니다. 정부의 높은 분이 와서 말씀하신다고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 교단에 어떤 분과 같이 올라가셨습니다. 그 분은 얼굴이 거무티티하고 키도 몸집도 아주 컷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그 분을 소개하셨는데 성은 백(白), 그리고 이름은 금방 잊었었습니다.
그게 내게 무슨 상관이에요? 공부 열심히 하라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나 하시겠지, 뭘….

그런데 그 분이 입을 열어 말씀을 시작하시는데 뭔가 좀 달랐습니다. 체구만큼 목소리도 우렁찼어요. 생전처음 들어보는 굉장한 웅변이었습니다.
내가 얼마 전에 읽은 플루타크 영웅전이 떠올랐습니다. 씨저의 시체 앞에서 로마 시민들에게 브루투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서로 상반된 연설을 하며 민중에게 호소하는 장면이었죠.

말씀을 들으며 나는 내가 마치 로마 시민이 된 기분이었어요. 큰 감동! 지금도 그 분의 목소리와 제스처가 생생히 떠오르니까요.?
제 나이 내년이면 80이 됩니다. 여러 면으로 기억력이 감퇴했지만 그 날 그 때의 흥분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한강의 기적> 의 밑거름을 뿌린 분이 바로 백락준 선생이셨군요.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의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할 진정한 은사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도 학교는 쉬지 말아야 한다는 그 분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나는 몇 년을 피난민 신세로 허송세월 했겠죠.
요즘 중동의 참화 속에서 방황하는 어린이들을 볼 때, 저 애들은 왜 백락준 같은 선생이 없을까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백낙준 선생님! 그리고 Mr. 우디 백


정홍택 / 포토맥 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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