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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우리를 철들게 하는 것

지난 3월 30일 월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앗, 그런데 주방에 은은히 퍼지며 또다시 주어진 하루라는 감사한 선물을 만끽하게 해주어야 할 커피 향이 어디로 간 것일까? 아무런 향이 나지 않았다. 얼른 한 모금 마셔보았다.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이상해서 소금을 찍어 먹어 보았다. 다행히 짠맛은 있었다. 지난 주말부터 냄새와 미각이 없어졌다고 자가격리에 들어가신 사돈어른이 생각났다. 낮에 아들 집에 가서 피자를 한쪽 먹는 데 아무 맛이 안 느껴졌다. 마치 두꺼운 종이나 가죽을 씹는 느낌. 그저 억지로 넘겼다. 손녀가 하루 세 시간씩 다니던 데이케어도 문을 닫고, 육아를 도와주시던 이모님도 오지 못하게 되니, 두 살도 채 안 된 연년생 아이 둘 데리고 종일 힘들어하는 며느리도 도와줄 겸, 한두 주째 매일 둘째 아들 집에 가서 손주들과 신선놀음을하던 중이었다.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셧다운으로 상담과 북클럽 등 모든 것이 중지되어 다른 할 일도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그즈음 몸살기도 참 자주 있었다. 아이들하고 종일 노는 것이 힘에 겨워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 날 아들은 일하는 병원에서 바이러스 진단검사를 받았는데, 먼저 독감 바이러스를 체크하고 아니면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한다고 했다. 다음 날, 독감은 아니고 코로나바이러스인지 결과를 기다리게 되었다. 아들의 권유에 따라, 4월 1일부터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4월 3일 아들은 양성판정을 받고 두 주간 자가격리를 시작했다. 함께 사는 사돈어른은 호흡이 힘들어지셔 결국 입원까지 하셨다.

아래층에 사는 큰아들이 자기도 미열·오한·피로감이 있다며 자가격리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는 정말 심란했다. 위층에 별로 올라오지 않는 데도 감염이 된 모양이었다. 그 주간 후각·미각 손실은 물론 미열·근육통·설사 등 증상들이 내게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호흡 곤란이나 고열이 없으면 병원 치료나 테스트도 받을 수는 없던 때였다. 주치의 선생님과 전화로 진료를 받으니, 코로나 증상이 맞는 것 같다고 하신다. 마늘·생강차를 만들어 하루에 여러 번씩 마시고 비타민C와 에키네시아라는 면역력 증강해준다는 약, 그리고 미열과 근육통에는 타이레놀만 먹으며 버터야 했다.

음식 맛을 못 느끼니 식사가 가장 큰 고민이자 고문이었다. 음식을 사러 나갈 수 없는 나를 위해 많은 분이 음식을 갖다 주었다. 유일하게 먹고 싶은 생각이 나는 게 설렁탕과 오렌지여서 이 두 가지를 진짜 많이 먹었는데, 뉴스에 보니 뼈를 우려낸 국물과 오렌지가 바이러스와 싸우는데, 아주 좋다고 했다. 그런 것들을 먹고 싶어 한 내 몸이 신기하고도 신통해서 혼자 웃었다. 문자 받고 문을 열어 보면 문밖에 놓여있는 따뜻한 음식들, 나를 위해 울면서 금식하며 기도한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민처럼 그렇게 사람들의 사랑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살아났다.



큰아들의 페이스북 글을 본 많은 지인의 안부 문자와 전화를 받았다. 힘든 곳에 계신 선교사님들이 오히려 미국에 있는 나의 안부를 물어야 했던 그 시절, 연락 오는 분들에게마다 부탁할 것은 기도밖에 없었다. 나와 나의 삼십 대 아들 둘이 다 증세를 보이던 그때, 젊은 사람들도 코로나로 생명을 잃는 소식들을 늘 뉴스에서 보아야 했던 그때, 나의 코로나와의 싸움의 49%가 육체적인 것이었다면, 51%는 공포와의 심리적 싸움이었다. 다행히 나와 아들 식구들은 2주 정도 후 모든 증상이 거의 사라졌다. 4월 중순부터는 두 아들도 다 직장에 복귀했다. 사돈어른도 일주일 만에 퇴원 후 완치되셨다. 나도 4월 말부터는 전화로 상담을 다시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회복되었다.

이번 코로나와 싸우며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우리 삶의 가장 절실하고 큰일들은 내 손안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와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들이 동시에 처한, 생각지도 못했던 공포스런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숨 하나 편히 쉬는 것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니 절대자와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고 겸손해진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쇼핑과 많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고 사랑이었다. 한 달 동안 나가지도 못하고 쇼핑은 못 해도 살았지만, 친지와 한 잔의 커피를 놓고 마주 앉았던 그 평범한 시간은 몹시도 그리웠다. 별로 안 만나던 사람들조차 그리워지고, 너무 많아 좀 막아놨던 페북 친구들도 자가격리 첫날 다시 다 열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존재였다.

요즘도, 얼마 안 되는 음식을 받으려고 늘어선 긴 줄들, 양로원에 계신 부모님과 자녀들의 유리창 너머로의 대화를 뉴스에서 보거나, 없는 일자리를 기다리며 길거리에 동상처럼 모여 서 있는 남미 친구들을 볼 때, 그리고 실업수당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자영업자들의 생계난을 들을 때, 울컥한다. 빨리 모든 일이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게 된다. 진수성찬이 아니라도 맛을 느끼며 신나게 먹을 수 있었던 소박한 밥상과 고단한 몸일 망정 매일 일어나면 일을 할 수 있던 그 일상이 얼마나 기적처럼 행복했는지 깨닫게 되는 요즈음,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를 철들게 한다.


김선주/NJ 케어플러스 심리치료사·전 포트리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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