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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네트워크] 미 외교관의 5·16, 12·12 회고

워싱턴에 한국통 외교관은 많지만 한·미 관계의 중대 사건을 모두 목격한 이 중 한 사람이 로버트 리치(90) 전 벨리즈 대사다. 그는 1952년 미 구축함 초급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국무부 외교관으로 처음 부임한 곳이 주한대사관 정무과였다.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 때 강원도 춘천에서 유엔선거 감시 업무를 맡아 돈 봉투, 고무신 선거를 본국에 보고했고 4·19 혁명 때도 경무대 앞 경찰의 발포로 많은 대학생이 숨진 현장에서 시위대와 함께 건물 안으로 피신해가며 상황을 타전했다. 이듬해 5·16 쿠데타 당일 마셜 그린 대사 대행이 카터 맥그루더 연합사령관과 윤보선 대통령을 만날 때 서기 자격으로 동석했다.

리치 전 대사는 지미 카터 행정부 4년 내내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냈다. 미 의회 불법 로비 사건인 코리아 게이트를 뒤처리하고, 주한미군 철수 공약을 철회시키느라 곤욕을 치렀다. 이어 한국에서 79년 10·26과 12·12 사태와 1980년 5·18 민주 항쟁이 잇따랐다.

그런 그가 지난 12일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SAIS) 한국학연구소가 주최한 12·12 4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 한국의 두 번의 군사 쿠데타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은 데 대해 통념과 다른 사실을 밝혔다. 당시 한국 지도자가 휴전선에 배치된 한국군 전방 사단을 남하해 쿠데타군을 진압하겠느냐는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5·16과 12·12엔 아주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5·16 때는 윤보선 대통령(장면 총리는 은신한 상황)이 그린 대사와 맥그루더 사령관의 전방 사단 투입 제안을 거부했고, 12·12 때는 노재현 국방장관(최규하 대통령은 연락 두절)이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와 존 위컴 사령관의 제안을 거절했다. 휴전선을 비울 경우 북한군 침략 위험이 크고, 한국군 간 대규모 유혈 사태가 불가피하다는 거절 사유도 똑같았다.”

제임스 퍼슨 SAIS 교수는 “미국이 내정 간섭과 주권 침해에 대한 반발 우려 때문에 주한미군을 동원할 수는 없었지만, 반란군 진압을 위해 전방 사단 이동까지 제안했다는 점은 당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한 번 쓴 역사는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전히 현대사 학자들 사이엔 미국 책임론이 논란이지만 부차적인 문제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는 무참했다. 우린 오랜 시간 또 다른 길을 내야 했다. 노(老) 외교관의 회고 가운데 변치 않은 유일한 사실은 북한 위협뿐이다.


정효식 / 워싱턴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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