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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추억 속의 한강 에어 쇼

정만진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가작
peterjung49@naver.com
LNG Specialist

이번 국군의 날은 북핵 문제로 야기된 한반도 긴장 상황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지 않고 평화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어느 때보다 간절했다. 군 복무 중 국군의 날 열병식에 참여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대공포 부대 운전병이었던 나는 포차 여러 대가 나란히 열과 오를 맞춰 일정 속도로 움직이는 훈련을 반복하느라 지치고 힘들었지만, 행사 당일 여의도와 시청 앞 광장에서 열렬히 환호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었다. 인터넷뉴스에 올려진 건군 69주년 국군의 날 기념식 에어쇼를 보다가 유년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1960년대 초반, 국군의 날이 되면 한강에서 에어 쇼가 열렸다. 한강 상공에서 벌어진 에어 쇼는 서울 시민에게 특별한 볼거리였다. 아침 일찍부터 한강 인도교 주변에는 에어 쇼를 보러 온 수많은 인파로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찼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비행기를 보려고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연신내를 따라 북한산 쪽으로 조금 가면 30여 호가 모여있는 새장골이라는 마을에 살았다. 시내버스는 불광동까지만 운행되어서 서울 시내를 가려면 고개 하나를 넘어야 했고, 불광동에는 학교가 없어서 녹번동에 있는 은평국민학교에 다녀야 했다. 주변 환경이 열악했던 시절 아버지는 먼 길을 마다치 않고 두 번이나 에어 쇼에 데리고 가셨다. 지금도 에어 쇼를 처음 봤을 때의 감동과 아버지를 잃어버려 두렵고 막막했던 추억이 떠오를 때면 심장이 두근거린다.

에어 쇼는 여러 기종의 비행기들이 편대를 이루어 인도교 상공을 차례로 지나가며 관중들에게 인사하는 공중분열로 시작된다. 다음에는 오색 연막을 뿜으며 빠르게 나타난 곡예비행기 편대가 인도교 상공에서 하늘 높이 솟아올라 원을 그리기도 하고, 서로 부딪칠 듯이 스쳐가기도 하면서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곤두박질치던 비행기가 아슬아슬하게 다시 솟구치면 군중들도 모두 ‘후유~’ 하고 안도의 탄성을 질렀다.



또한 한강 백사장에 설치한 목표물에 로켓탄을 명중시키며 우리 공군의 믿음직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L-19 경비행기가 한강 인도교 다리 밑으로 통과한다는 묘기는 끝내 보지 못했지만, 보고 싶었던 비행기를 마음껏 볼 수 있어 좋았다. 거대한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백사장으로 뛰어내리던 공수특전단 베레모 아저씨들의 멋진 모습을 보며 나도 이다음에 크면 공군이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두 번째 에어 쇼를 보러 갔을 때 아버지를 잃어버렸다. 행사가 끝난 후 교통통제로 인해 버스가 바로 다니지 못했고, 설령 버스가 온다 해도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 탈 수도 없었다. 그래서 서울역까지 걸어가 동네로 가는 버스를 이용하려는 인파가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 틈 속에 끼어 걷다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삼각지 어디쯤에선가 아버지와 멀어지고 말았다.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잰 걸음으로 남영동을 지나 서울역까지 달려갔다. 아들을 잃어버리고 낙심하고 계실 아버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곳은 서울역에서 불광동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밖에 없다는 생각에 해 질 무렵까지 마냥 서서 기다렸다. 어느덧 석양이 뉘엿뉘엿 만리동 고개를 넘어가 광장에 어둠이 깔릴 때까지도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어서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만 가득했다. 염천교 다리 밑에는 먼 길을 달려온 철마들이 하나 둘 지친 몸을 추슬러 차고로 들어가 철길은 한산해졌고, 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떠났다.

성격이 무척 소심했던 나는 버스를 기다리던 어른들에게 버스비 좀 도와달라는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내가 집으로 갔겠거니 생각하고 서둘러 집으로 가신 것이었다. 하지만 집에 가보니 없어서 내가 밤늦게 도착할 때까지 온 가족이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집까지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집까지의 거리는 짐작이 안 됐지만, 가는 큰길은 대강 알 것 같았다.

서대문 사거리를 지나 독립문 앞까지 걸어갔다. 어린 눈에 무악재가 얼마나 높아 보이던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게 넘었다. 무악재를 넘으면 홍제동이다. 홍제 천변에 극장이 있었는데 “돌아오지 않는 해병’ 같은 반공 영화들을 단체로 관람하던 반가운 곳이었다. 극장 앞을 지나 고개를 하나 더 넘어서 녹번동에 도착했다. 내가 매일 오가는 반가운 은평국민학교에 도착하니 집에 다 온 것처럼 안심이 되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가족들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리고 허기도 몰려왔으나, 단숨에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 품에 안겨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한강 백사장 에어 쇼의 아련한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절망하지 않고 밤길을 걸어 가족을 찾아간 나 자신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달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10주기였다. 평생 가족을 위해 희생하신 아버지, 봄에는 창경원 벚꽃 구경도 시켜주고 어린 나에게 자전거 타는 법도 가르쳐 주며 당신의 방식대로 삶의 지혜와 EQ Emotional Quotient를 키워 주셨던 아버지가 오늘따라 무척 그립다.

정만진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가작
peterjung4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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