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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열며] 겨울 배웅

북풍이 뒷걸음치며 허옇게 바랜 나무가지를 흔들며 쫓겨간다.

언 땅에 온기를 뿌리며 우수(雨水)가 지나가고, 대지는 숨을 골라 새로 시작될 삶을 준비한다. 눌렸던 가슴을 펴고, 고개 들어 구름이 비켜서는 하늘을 보라. 그리고 그 따사로운 생명의 볕으 로 덥힌 몸을 일으켜 팔도 뻗어보라. 한 생을 마감하고 길게 누운 누런 풀잎더미 속에서 새로 발아된 싹이 흙더미를 밀어내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다. 쫓기는 겨울을 오는 봄이 그렇게 재촉하고 있다.

구름이 낮게 내려 앉은 흐린 하늘에서 흰 눈이 퍼얼펄 흩날려 세상을 덮었다. 모든 만물은 숨을 멎고 하늘에 고해성사하듯 납작 엎드렸다. 마치, 처음 보는 어느 행성의 낯선 침묵처럼 딴 세상을 만들어 낸다. 하늘이 베풀어준 휴교에 아이들은 신이 났다. 얼마나 고마운 눈(雪)인지 그들의 눈가에 즐거운 웃음이 가득 들었다. 즐겁기는 나도 마찬가지이다. 얼마나 나이를 더 먹어야 현실감 있는 어른이 될지…. 일하러 나간 이들의 퇴근길이 조금 걱정이 되긴 하다. 옛 산수를 그린 수묵화처럼 눈 오는 창 밖의 풍경은 낡은 프레임에 담긴 소리 없는 그림이다.

'나는 몇 차례 즐거이 몰아치는 눈보라를 무사히 견뎌냈다. 문 밖에는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쳐 부엉이의 울음소리마저 잦아드는 동안에도 불가에 앉아 행복한 겨울 저녁시간을 보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수필집 '월든' 중에서

소로가 미국 메사추세츠주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 하나를 지어놓고 2년여를 살면서 겨울을 지나는 소회를 글로 남겼다. 밖에는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치기에 통나무집안 불가에 앉아 누리는 그 따뜻함이 더 행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나도 밖에 쌓이고 있는 눈의 두께가 두꺼워 질수록 집안에서 느끼는 안온함이 더 크게 느껴지던 겨울이었다.

이따금 구름장이 열리며 뿌려지는 따뜻한 볕에 우리집 창가엔 부겐베리아꽃으로 화려했다. 걸을 때마다 나풀거리는 여인의 갑사치마 자락같은 진분홍 포엽이 밖의 눈 세상과 대비되어 더욱 참하고 기특하게 보였다. 덩굴성 관목으로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라는 부겐베리아의 꽃말은 정열, 영원한 사랑이다. 아열대의 뜨거운 햇볕 아래 화려한 꽃 색 만큼이나 어울리는 꽃말인 것 같다.

생장점이 위로만 뻗는 가쟁이들을 잘라내어 물에 꽂아놓았더니 그 가쟁이에서도 싹이 나오고 있다. 수 년 전, 작은 부겐베리아 묘목을 내게 주어 이렇듯 아름다운 꽃을 보게한 친구처럼, 나도 물병에 꽂혀 싹을 피워내고 있는 이 부겐베리아 묘목을 전해 줄 이름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벌써 즐거워진다.

하얀 세상을 만들어 준 겨울 속에 진분홍 부겐베리아로 행복하던 시간들이었다. 이제 곧 헐거워진 땅을 뚫고 개구리가 튀어 나오고 조용하던 벌판은 온통 봄의 생동감으로 시끌거릴 것이다. 아쉬운듯 돌아보는 겨울에게 '잘 가'라고 손 저어 배웅이라도 해 주고싶다.


이경애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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