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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망경] 소통, 쇼통, 또는 소똥

병동환자 로버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코로나 사태 때문에 우리 모두 스트레스가 심한 판국에 약을 안 먹겠다니? 아무래도 법정에 가서 판사가 내리는 결정을 따라야 되겠다.”

환자의 인권존중 때문에 강제 투약은 꼭 법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 전에도 법원의 강제 치료 판정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걸핏하면 자기가 젊었을 때 보디빌딩을 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그리고 셔츠를 들어 올려 거북이 배처럼 희미하게 금이 간 복근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린다 맥칼리스터(Linda McCallister)의 저서, ‘I wish I’d said that, 내가 그걸 말했었으면’(1992)에 나온 대화방식 여섯 가지를 여기에 이렇게 간추린다.

①귀족형- 직설적이고 솔직하다.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어린아이가 “임금님이 빨가벗었다” 했던 말이 좋은 예. 본 대로 느낀 대로 하는 황당한 화법이다.



②소크라테스형- 문답식으로 사태를 설명하고 어떤 해결을 모색하는 대화 방법. 남을 가르칠 때 잘 쓰인다. 정신과 의사들도 종종 이 수법을 쓴다. 깐깐한 대화 절차.

③반추형- 대화의 흐름과 상호관계를 유지하는 마음가짐. 절대로 상대방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정도가 심한 경우에 화자는 무골호인이라는 말을 듣는다.

④집정관형- 단호한 발언이다.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태도. 다분히 독단적이고 독재적이다. 군대 지휘관이나 CEO 스타일. 고집불통의 직장 상관!

⑤후보자형- 끊임없이 재잘재잘 이야기한다. 화자는 쉬지 않고 말하는 동안 세상이 평온하다고 굳게 믿는 듯하다. 입에 침을 튀기는 수다쟁이!

⑥상원의원형- 뚜렷한 목적이 있는 침묵을 고수한다. 사실 이들은 본심을 숨기기 위하여 말을 한다. 차분하고 계산적이면서 내숭스러운 화법.

그날 로버트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내가 얼떨결에 사용한 대화법을 이렇게 분석한다. ①의 귀족적 20%, ③의 반추적인 태도로 한 관계유지 노력이 40%, ④의 집정관다운 단호함이 10%, ⑥의 상원의원 같은 본심 감추기가 30%로 섞여졌다. 그때 상황에는 ②의 소크라테스형 문답이나 ⑤의 후보자형 수다스러운 수법이 들어설 틈이 전혀 없었다.

로버트의 화법은 어떠했는가. 그의 언어는 정신과에서 말하는 ‘형태적 사고장애(formal thought disorder)’ 범벅이었다. 자기가 힘이 세다는 증거로서 거북이 배 복근을 과시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한다. 그와 나 사이에 그 외에 어떤 의미심장한 의사소통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로버트는 나에게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하지 않고 이른바 쇼통(show通)을 한 셈이다. 나 또한 그쯤 해서 화제의 본질을 망각한 채, “야, 너 젊었을 때 힘깨나 썼었구나!” 하며 감탄하듯 응수했다. 이렇듯 필요한 말 대신 부질없는 말만 늘어놓는 대화를 ‘bullshit’이라 한다.

‘bullshit’은 ‘헛소리’라 번역하지만 ‘shit, 똥’과 합쳐진 말이기 때문에 듣기에 거북살스러운 비속어다.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지성인 취급을 받지 못한다. 한담(閑談)이라는 묵직한 한자어가 있지만 ‘불쉿’이 풍기는 짜릿한 뉘앙스가 없어진다.

‘bullshit’의 ‘bull’은 ‘황소’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 말은 고대 불어 ‘bole’에서 유래한 ‘가짜, 사기’라는 뜻이었다. 로버트와 짧은 대화를 마친 후 마음이 잠시 어두웠다. 그와 나는 소통이 아닌 ‘소똥’을 한 것이다.


서량 / 시인·정신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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