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가을 특집]이 가을에 들어볼 만한 음악

[최예린의 문화 cafe]러시아의 비가, 엘레지

햇살은 따가운데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벌써 저만큼 높이 올라가 있다.
어디선가 잎새 하나가 바람 타고 팔랑이다가 허공에 작은 음표를 그리며 동그랗게 내려앉는다.
가을이다.

러시아 하면 눈 덮인 하얀 평원을 떠올리게 되지만, 여기에도 사계절이 있다.
특히 러시아 특유의 스산한 정취를 가득 담고 있는 엘레지(Elegy)는 이 가을에 꼭 한번 들어볼 만한 작품이다.




슬픔과 장송의 노래, 엘레지를 포함하고 있는 러시아의 대표적인 피아노트리오 작품 네 편을 소개한다.


♬안톤 아렌스키의 피아노트리오 1번

안톤 아렌스키(1861-1906)는 불과 45세의 나이로 낯선 땅 핀란드에서 객사한 러시아 작곡가다.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서 음악 수업을 받았지만, 내용적으로는 차이코프스키에 훨씬 가까운 작풍을 지녔다.
그의 제자로는 라흐마니노프를 꼽을 수 있다

아렌스키는 세 편의 오페라를 비롯하여 두 개의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극 부수음악(Incidental Music) 등 다양한 양식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피아노 트리오 제1번 (Piano Trio No.1, Op.32,D minor,1893)은 러시아의 서정미를 담뿍 담아내고 있는 빼어난 작품으로서 여전히 오랜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명 첼리스트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카를 다비도프(Karl Davidov)에게서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다.


그러나 작곡 도중 다비도프가 죽음으로써 펜을 든 지 실로 5년 만에 내놓은 ‘죽은자에 대한 증언(posthumous testimony)’이 되고 말았다.
비장한 음색의 첼로가 리드하는 드라마틱(dramatic)한 첫 주제가 인상적인 1악장은, 이어 따스한 서정성(Lyrical)으로 옮아가며, 다시 죽음에 대항하듯이 격렬하고 충동적(impetuous)인 세 번째 주제로 연결된다.
이어 흔히 ‘아렌스키의 왈츠’라고 부르는 리드미컬한 부분으로 안정감 있게 확장된다.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3악장 엘레지는 특별한 형식이 없이 매우 자유롭게 작곡되었다.
들으면 저절로 눈물이 배어 나올 것만 같다.


♬차이코프스키의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

차이코프스키의 명작, 피아노 트리오 (Piano Trio, A minor, Op.50, 1882)에는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위대한 예술가란 바로 피아니스트이자 모스크바 컨서바토리 음악감독을 지내고 차이코프스키를 직접 가르친 바 있는 니콜라이 루빈스타인(Nikolay Rubinstein)이다.


루빈스타인의 부음을 접한 차이코프스키는 이 위대한 스승의 발자취를 기념하기 위해 피아노 트리오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작곡 내내 깊은 상실감에 젖어 있었지만, 그 슬픔은 온몸을 휘적휘적 풀어놓는 자기연민으로 표출되지 않고, 지난 추억들에 생생한 의미를 다시 부여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작품의 구성은 다소 파격적인데, 전통적인 4악장이 아니라 주제와 변주곡 형식의 단출한 2악장 체제를 택했다.
아마 그가 존경했던 또 하나의 위대한 예술가 베토벤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의식한 것으로 보여진다.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1악장은 말 그대로 비가적인 악장(Pezzo elegiaco)으로서, 피아노의 분산화음 위에 얹혀지는 묵직한 슬픔의 음색, 첼로가 인상적이다.


슬퍼서 엉엉 울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상실감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 뚜벅뚜벅 제 가던 길을 마저 가는 게 인생이라면, 2악장도 마저 들어보자.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처럼, 이 악장은 차이코프스키의 수수께끼 변주곡(Enigma Variations)이라 불린다.
11개로 이루어진 각 변주는 루빈스타인의 일생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따라가게 한다.


♬쇼스타코비치, 웃음 저 너머에 슬픔이

러시아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위대한 피아노 트리오 작품 두 개만 들라면, 누구나 주저하지 않고 차이코프스키와 쇼스타코비치를 꼽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가 스승 루빈스타인을 기려 작곡에 몰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쇼스타코비치는 가장 절친한 친구이자 비평가였던 이반 솔레틴스키(Ivan Sollertinsky)의 죽음을 계기로 피아노 트리오(Piano Trio, No.2, E minor, Op.67, 1944)를 썼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4악장 구조를 택했지만, 그 어느 것 하나도 전통적인 패턴을 따르지 않는다.
첼로로 시작되는 1악장은 너무나 자유로워서 어리둥절하고 불안한 출발을 보인다.
그러나 몇 초, 몇 분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제시되었던 주제가 되는 네 음이 마치 박자를 재는 매트릭스(matrix)처럼 작용하며 음악 전체의 리듬을 이끌어 나간다.


3악장(라르고)이 엘레지 풍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보다 더 비장한 슬픔은 없다.
마지막 4악장은 참으로 유니크한 음악이다.
자기 작품에서 처음으로 유대인들의 민속 멜로디를 사용한 쇼스타코비치는, 밖으로 나타나는 경쾌한 웃음과 춤, 저 너머에 자리한 유대인 특유의 슬픔을 빌어와 반어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매력적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엘레지 풍의’ 피아노 트리오

작곡가로서 일찍이 두각을 나타냈던 라흐마니노프는 13세 무렵 이미 안톤 아렌스키의 화성 수업을 듣는 학생이었다.
그는 일생을 통해 피아니스트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대표적인 러시아 작곡가 중 한 명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렇듯이 젊은 날에는 아직 실현되지 못한 열망을 지닌 채, 끝없이 선배 작곡가들을 모방하면서 가슴 아픈 헌정을 바쳤다.


라흐마니노프는 선배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죽음을 듣고 바로 작곡을 시작해서 단 6주 만에 피아노 트리오(Piano Trio, No.2, D minor, Op.9, 1893)를 완성했다.
이것은 누가 보나 루빈스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차이코프스키가 쓴 피아노 트리오, ‘어느 위대한 예술가를 기리며’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었다.


작곡 이듬해 초연을 보았지만, 불과 20세 청년의 작품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후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까지 여러 번에 걸쳐 이 작품을 고치고 손보게 되었는데, 정식 악보출판은 1950년에 와서야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는 그 동안 이루어졌던 자잘한 개정은 무시하고 1917년 판, 세 번째 버전을 완성본으로 본다.


3악장 구조를 지닌 이 작품에서 심금을 울리는 대목은 역시 엘레지 풍의 1악장이다.
오랜 개작을 거쳐 청년 라흐마니노프가 지녔음직한 소비적인 감상성이나 작곡 기법상의 미숙함은 완전히 걸러지고, 이슬처럼 순수하고 영롱한 눈물 한 방울만 남았다.


[이 음반을 들어보세요]

1.ARENSKY, Piano Trio No.1 in D minor Op.32, The Borodin Trio, CHANDOS
2.TCHAIKOVSKY, Piano Trio in A minor Op.50, Kempf Trio, BIS CD
3.SHOSTAKOVICH, Piano Trio No.2 in E minor Op.67,
? Leonskaja(piano)/Borodin Quartet, ELATUS
4.RACHMANINOV, The ‘Elegiac’ Piano Trios, The Borodin Trio, CHANDOS

* 엘레지(Elegy)란?
그리스 어 엘레게이아(elegei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슬픔의 시(悲歌), 죽은 자를 애도하는 시(挽歌)로서, 문학에서는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이나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가 대표적인 엘레지로 손꼽힙니다.


음악에서는 특별한 장르 없이 그러한 내용을 가진 음악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마스네의 가곡 ‘ 엘레지’가 유명하며, 차이코프스키는 교향곡으로 형상화하기엔 어딘가 가볍다고 느꼈던 곡들을 묶어 관현악 모음곡을 펴냈는데, 그 중에서 3번 모음곡 첫 악장에 엘레지 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 THE BORODIN TRIO
보로딘 사중주단의 창단 멤버이자 30여 년 동안 제1바이올린을 맡아왔던 두빈스키(Rostislav Dubinsky)가, 지난 1976년 러시아를 떠나 서방 세계로 망명하면서 새로 창단한 삼중주단입니다.
피아노는 그의 아내인 에드리나(Luba Edlina), 첼로는 투로브스키(Yuli Turovsky)가 맡고 있으며, 황혼기를 맞이한 현재까지 멤버 교체 없이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예린(밴쿠버 중앙일보 음악전문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