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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원이 만난 사람] "하나님과 양심 앞에 떳떳하고 진실된 삶"

조찬조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상임이사
42년 이민 ‘시카고와 덴탈’ 외길
소수계 한계 정치 참여로 극복해야

어떤 이의 인생을 통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달동네 사회운동가에서부터 유명 스포츠 선수, 종교인, 정치인, 재벌 회장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듣고 이를 누군가에게 소개할 수 있었던 신문쟁이 생활 30년은 그런 점에서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조찬조 전 시카고 상공회의소 회장을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10여년 이상 인연을 이어왔으나, 이번 인터뷰는 또 새로웠다. 누군가의 삶을 마주 본다는 건 늘 그런 것 같다. 충남 공주 출신답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그의 인생 이야기는 마치 연금술사의 제련 과정 같았다.

"참 오래 됐네.”
1960년대 중반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누이로부터 “기회의 땅 미국으로 가라”는 권유를 받은 그는 1976년 가을,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시카고로 이민을 왔다. “당시만 해도 한국의 회사들은 뇌물과 편법 등 못된 방법을 많이 사용했는데 나하고는 맞지 않았다.”

부인 조진수 씨와 함께 1인당 600달러, 총 1200달러를 들고 시카고에 이민 온 그는, 미군에 입대한 친구가 남겨둔 스튜디오에서 며칠 지낸 후 스스로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자동차가 없어 쉐리단 길을 걸어다니면서 구직 활동을 했다.



“비즈니스를 하라”는 선배의 권유를 받고 남부에서 가발 또는 옷 장사를 하려고 했지만 생리에 맞지 않아 선택한 일이 덴탈 랩(Dental Lab)이었다. 육군 군의학교(의무병)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수도방위사령부에서 치과병으로 3년간 복무했던 게 평생의 업으로 이어졌다.

낮에는 랩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나가 보철학 이론을 배운 그는 4년만에 개업을 했고 지금까지 외길을 걷고 있다.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과 빼어난 솜씨로 업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1980년대 말 지인들과 함께 덴탈 보험 회사에 이사로 참여, 일리노이 주 업계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하지만 이 회사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일부 노조(Union)와의 계약이 문제가 되면서 손을 놓아야 했다.

"법과 원칙 위에 있는 것들이 있더라. 소수계로서 성장하는데 한계와 걸림돌이 있었다.”

이후 커뮤니티 활동에 더욱 활발하게 참여했다. 아시안 얼라이언스 수석 부회장을 지냈고 한국인의 미국 비자 면제 운동에도 앞장섰다.“비자 면제를 위해 4천 명의 사인을 받아 일리노이 연방 하원의원 19명에게 200여개씩 보냈는데 유일하게 답이 온 게 현재 시카고 시장인 람 이매뉴얼이었다.”

시카고상공회의소,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 한인사회발전협의회 등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이를 잘 내색하지 않은 조 회장이지만 오바마 대통령과 시카고 시의회의 표창(Recognition), 쿡카운티 서기관 감사패 등 다양한 수상은 그의 부단한 노력과 참여를 알려준다.

정치 참여에 관심이 많은 그는 '폴리틱 액션'(Politic Action)이란 단체를 만들어 제시 화이트 주 총무처장관과 리사 매디건 검찰총장 등을 후원 하면서 한인 커뮤니티와의 토론회를 주선하고 한국인 고용 등을 당당하게 요구했다고 밝혔다. 토니 프렉윙클 쿡 카운티 의장의 아시안 커뮤니티 후원 회장도 지냈다.

그는 1950~60년대 이민해 인종차별을 겪은 선배들의 조언과 개인적인 경험들이 적극적인 참여를 선택하게 만들었다고 털어놓았다.

"1970년대 초까지 위스콘신과 일리노이 주 경계에 있는 소도시 안디옥과 세일럼 인근 도로에는 '흑인과 유색인은 지나다니지 말라'는 표지판이 버젓이 서 있었다. "

조 회장은 "출석 교회 교인들과 함께 기도원 설립에 나섰을 때, 당초 목장을 팔기로 했던 농장주가 '아시안이 유입되도록 만들면 총 맞게 될 것'이라는 이웃의 협박에 못 이겨 계약을 취소한 일이 있다"고 회고했다. 현재의 기도원 땅을 구입한 이후에도 누군가 출입구에 쓰레기를 쌓아놓았다고 기억했다. .

"결국은 정치 참여에 의해 우리 위상이 결정된다. 한국인은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지혜롭다. 경제적으로도 빨리 자리잡는다. 하지만 주류 사회의 당당한 일원이 되고 소수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그는 최근 한인 사회 각 단체가 활발한 참여를 주도하는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힘을 모아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한인 커뮤니티끼리는 물론, 단합을 해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다른 소수계와도 연대해 힘을 더 키워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때 심혈을 기울였던 상공회의소, 민화협 등과 관련해서는 말을 아꼈다. 단 “상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져 안타깝다"는 말로 복잡한 심경을 표현했다.

“사람은 진실해야 한다. 인간 관계든 비즈니스든 한결 같아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는 조 회장은 “사람들의 평가로 인해 힘들고 어려울 때면 늘 '하나님과 양심 앞에 진실했고 떳떳했나' 자문한다”고 말했다.

40년 가까이 운영해온 덴탈 랩을 5년 전 직원들에게 조건 없이 물려주고 은퇴했다가 3년만에 운영난에 처한 것을 보고 다시 일선에 복귀했다는 그는 “어쩌면 내 사회생활의 마지막 프로젝트가 될 지 모르겠다. 나를 위해 일해준 직원들이 충분히 먹고 살 만큼 회사를 다져놓으면 은퇴하고 두 아들(요한, 요셉) 슬하의 손자 손녀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42년의 이민 세월을 시카고에서만 보낸 그는, 한인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홍보위원회를 만들고 책자 3만권을 제작해 배포할 만큼 시카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시카고를 더 살기 좋은 곳, 더 많은 한인들이 찾는 곳으로 만드는 것은 이민 1세대의 경험과 2세들의 의지를 바탕으로 공고한 틀을 세워가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발행인>


노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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