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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적을 넘어 믿음으로”

이대열 목사 종교칼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증거하시고 구약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증거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온전히 깨닫고 받아들이지 못한 걸림돌은 무엇인가?
첫 번째 그것은 지식과 지식의 충돌이다.
예수가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유대교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왜냐하면 복음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열려있었다. 복음은 율법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와 선민사상에 대한 지식에 갇혀있었다.
자기가 알고 본 지식만 옳다고 하는 고집은 진리와 비진리를 구별할 수 없게 만든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고집을 이렇게 한탄하였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열심은 바른 지식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2)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하며 의롭다고 인정받는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3) (롬 10:2, 3)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행위로 즉 율법의 준수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민족적인 배경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뿌리 깊은 지식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니고데모는 그 시대의 지성인이었다. 사고의 능력이 있었고 유대교라는 종교적인 지식과 경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지식과 경험과 철학에 고립되어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하여 열린 마음이 없었다. 이런 면에서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고집하는 하는 것은 명백한 죄이다.


내가 알고 경험하고 익숙한 지식의 세계에서 고립된 신앙생활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신앙생활 20년 해 봤는데 신앙은 이런 것이다”, “교회 생활은 이렇게 해야 한다” 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고집을 진리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죄인 것이다.
성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를 깨달으려면 얼마나 많이 자기중심적인 지식을 깨뜨려야 하는지 인정해야 한다.
지식과 지식의 충돌 즉 성경지식과 성경지식의 충돌 속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증거하신 하나님의 복음을 신뢰하며 받아들여야 했다.
둘째, 그 걸림돌은 바른 믿음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근거를 항상 표적에 두었다. 기적은 일상의 차원을 넘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외적인 변화다. 홍해가 갈라진 기적, 문둥병자가 치유가 된 기적 같은 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변화다. 이렇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적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형상화하기를 원하였다. 하나님을 눈으로 확인하고 만질 수 없는 현실에 조급하였다. 그 결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믿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때나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자기들의 소원과 욕망과 갈증을 채우는데 하나님이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 보다 자기들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신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 즉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그 문제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때에 대하여 기다리지 못하고...점치는 곳에 가거나, 밤을 새우며 떼를 쓰듯이 기도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기독교는 성도들의 이 영적인 조급함을 공급해 주기 위하여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 “다니엘의 금식기도” 같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들이나 성공한 성도들을 강사로 세워서 좋은 믿음은 반드시 응답 받고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기도 응답이 느리거나 없는 사람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죄책감을 심겨주고 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과연 메시야인지 확신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는 중에도 표적을 구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2)
그러나 예수님은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 20:29)

기독교는 표적을 넘어 예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믿음을 강조한다. 성도는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받아들이고 예수께 순종하는 자다. 이렇게 믿는 자에게 영생이 보장된다. 영생은 현세에서 경험하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생명이다. 그렇다고 죽음 이후의 미래의 생명이 아니다. 미래에 완성될 생명이 현재적으로 선취된 생명이다. 현재적으로 소유된 생명이 지금은 보이지 않고 은폐되어 있지만 주님의 재림 때에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완성된 생명으로 경험될 것이다.
성도는 눈에 보이는 현상에 의지하여 살아가지 않는다. 그 너머의 객관적인 실체를 마치 보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그것을 보도록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이시오 또한 말씀이다. 말씀은 우리를 믿음의 길로...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한다. 깨닫고 아는 자는 자기가 알고 깨달은 것에 자신을 의탁한다. 성경의 약속을 진정으로 아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운명을 맡긴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같이 더 이상 밤중에 찾아오는 자가 아니라 담대하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그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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