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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카페] “고향 목화밭이 내 시의 명주”

허락받은 표절시인, 이정자 시인

“나는 표절시인이라고 소개하곤 해요. 친정엄마가 살아온 생을, 독백처럼 중얼거린 언어를 내 시 곳곳에 거름처럼 뿌려 썼거든요.” 첫 대면에 느닷없이 도발적인 표현으로 살짝 기자를 긴장시킨 시인의 남다른 배포에 끌리듯 인터뷰가 시작됐다.

1942년 태생, 첫 등단 2002년. 예순의 문턱을 넘어선 나이에도 당당하게 문학의 길에 발을 담글 수 있게 된 건 나름 ‘탄탄한 옛 시절의 추억과 인생의 굴곡’이 바탕이 된 숙명적 결과로 받아들인다는 이정자 시인. 이 시인은 “누구나 한 번쯤 꿈꾸듯 나 역시 여고 학창시절 문학소녀였던 덕에 숙명여대 국문학과까지 진학했다”며 “하지만 무역학과로 전과해 졸업 후 바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살다, 나이 마흔이 넘어 빈손으로 이민까지 와 발버둥 치며 살다 보니 어느 날 황혼의 역에 추레하게 서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고 살아온 흔적부터 털어놨다.

그리고 문득 ‘불행은 손톱 밑에서 자라고 행복은 발톱 밑에서 자란다’는 속담이 가슴에 사무치듯 와 닿아 실험처럼 손톱과 발톱이 자라는 속도를 관찰하기까지 했다는 이 시인. “결과는 손톱을 다섯 번 깎는 동안 발톱은 한 번만 깎으면 되더라고요. 손톱 밑으로 자란 고통과 상처로 몸부림치며 억울해하는 사이, 느릿느릿 발톱 밑에서 자라고 있을 그 행복마저 놓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어 나를 위한 행복거리를 찾았죠.” 아주 늦지도 아주 빠르지도 않은 인생의 순간에 문학을 도구 삼아 자아를 깨달은 셈이란다.

그렇게 일상에서 성실하게 세탁소를 운영하며 바느질하는 틈틈이 치열하게 글을 써 10년여 만에 71편의 시를 담은 처녀시집 『사막에 핀 풀잎의 노래(2010)』를 발간했다. 이 시인은 “경남 합천군 쌍백면 하신 부락이라는 벽촌 산지에서 자라며 목화를 따고,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목화 실을 뽑아 옷을 짓는 길쌈하는 엄마 모습을 보고 자란 건 이 시대에 누구도 쉬이 가질 수 없는 귀한 소재이자 추억”이라며 “고단하게 살아가면서 엄마가 평소에 넋두리처럼 뱉은 말들에 비유와 은유를 입힌 게 곧 나의 시어가 되고 시가 됐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를 엄마 표절시인”이라고 말한다.



특히 목화밭에서 시기 놓친 목화를 따며 엄마가 입버릇처럼 들려준 ‘석 새 베에 열두 새 솜씨’라는 말을 바탕으로 쓴 시는 2013년 시 전문지 『미주 시학』이 제정한 ‘미주시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시인은 “어렸을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 말을 삶의 교훈으로 새기며 살다 어느 순간 시로 재탄생했다”며 “볼품없는 실로도 솜씨 좋게 바느질하면 훌륭한 옷이 지어진다는 본뜻처럼, 고난과 어려움이 닥친 현실에서도 최선을 다해 부끄럽지 않게 살면 반드시 일어설 수 있다는 내용을 시에 담았다”고 소개했다.

또 시에서 고향과 엄마 외에 추가된 하나의 아련한 주제가 있다면 ‘가족’이다. ‘막무가내 졸라대던 막내 등쌀에 / 벼르고 별러 사준 미제 코코아 한 통 / “내일, 내일 하면서 석 달이었지 엄마” / 지금도 지우지 못한 그 기억 / 돌아보니 미안하구나 아들아 <미제코코아와 눈깔사탕 中> ’ 이처럼 넉넉잖은 살림 때문에 코코아 한 통 사주는 데 석 달씩이나 걸려 엄마로서 못내 미안함이 가득한 마음이 보석 같은 가시처럼 드러나는 시도 시집 곳곳에 박혀있다.

그동안 문학 없이 살아가며 아무리 바빠도 늘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이었다는 이정자 시인. 이 시인은 “비록 남들보다 한발 늦게 시작했지만 아직도 처음 글을 썼던 순간의 설렘과 글 쓰는 사람끼리 어우러진 모임에 나가 대화를 나누며 얻는 보람, 글을 읽는 가운데 느끼는 자신을 살리는 힘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느낌이 든다”고 수줍게 전한다.

이어 “지금까지 시 소재가 유년시절까지의 추억이나 엄마에 대한 그리움, 가족 등 주로 한국에만 의지해 썼던 게 적지 않다”며 “미국에 산 지 33년을 넘어서는 이 시점에 이제는 미국에 널리 퍼져있는 다문화나 천혜의 자연 풍경 등에 관해 한글과 영어로 시를 쓸 수 있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시인으로서 한층 더 무르익은 바람 하나를 밝혔다. 농익은 시인의 명주 같은 삶이, 표절을 허락한 어머니 마음에 곱게 짠 실크빛으로 물든다.



수의

그 해 윤 유월 / 장맛비 질척이던 오후
곱게 다듬질 된 명주 필 펼쳐 놓고
코마개 발싸개까지 / 헐렁한 옷 한 벌 지으시다
처마 끝 낙숫물에 눈빛이 젖어
지문 닳은 손끝이 가늘게 떨렸는데

일흔일곱 눈발 치던 해거름
장롱 깊숙이 간직했던 그 옷
서둘러 꺼내 입고 곱게 잠드셨다

(중략)

억새풀 같은 어머니
손수 짜고 손수 지은 명주 수의 차려 입고
제 집 지어 저를 가둔 고치 속 번데기처럼
참 깊이도 잠드셨다


진민재 기자 chin.minjai@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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