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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현의 시가 있는 벤치] 하관 -박남수

하관(下棺)

박남수

무덤을 파고
너는 관 속에 누워 있다.
둘레에 가까웠던 사람들이
애통하며 관 위에 꽃을 던진다.


흙도 뿌린다.
눈썹에 가리인 눈물을 통하여,
나는 너의 모습을 지우고 있다.
맑은 눈으로 볼 수가 없어서
눈물로 너의 마지막 모습을 지우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승과 저승으로 갈리었다.
누구의 만남도, 결국은
이렇게 갈리기 위하여 있었겠지만.
눈물의 투명을 통하여
자꾸 흔들어 지우면서,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거리를 만들고 있다.
흙을 덮고 나면 그뿐, 저 넓은
품에서 너를
다시 찾기는 어려우리라.
안녕, 안녕.


당신보다 두 해 먼저 간 아내 강창희(전 이대 음대 피아노과 교수)를 떠나보내고 장지에서 운 박남수의 울음 시다.
이즈음 부음(訃音) 광고가 잦다. 그중엔 내가 그의 문학 사랑을 한국문단에 알려주었던 나의 친지(이병기 시인)도 있다. 허탈했다. 자신이 의사인데도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도리가 없나 보다. 100세 시대에 회의가 온다. 아무튼, 지인들의 부음을 접할 때 우리는 멈칫 무엇을 생각하는가. 자신을 그 자리에 뉘어보는 찰나의 성찰이 머물지는 않을는지. 다시 멈칫해보는 것이다. 산다는 것, 살아있다는 것, 결국 그것은 한갓 구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허무와의 화해요 절망의 승화다.

생과 사, 그 이분법의 국경에서 존재 이상의 희망가치는 없지 않을까. 죽은 자는 묻고 산자는 그곳을 떠난다. 그것이 생자(生者)와 멸자(滅者)의 질서요 지상의 율법이다. 나와 아내는 슬픔 나누어 갖지 말고 함께 가지고 갔으면 좋겠다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때, 세상은 모를 일, 누구도 우리를 찾아 나서지도, 이유를 알아내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가고 싶은 것이다. 올 때 울고 왔으면, 갈 때는 웃으며 갈 법도 한데…. 그게 그리 안 되나 보다.

임창현/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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