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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268>바르똘로메오 데 라스 까사스 신부2

라스까사스가 인디아스 추기회의(아메리카 식민지 통치를 위한 에스빠냐 국왕의 자문기관) 앞으로 쓴 편지다. '인디오들은 기독교인에게 구원받는 것보다 불신자로 지옥에 가는 것이 훨씬 나았을 것입니다. 이미 수많은 인디오들이 흘린 피의 외침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산 채로 불타 죽은 자들 석쇠에서 구워진 자들 사나운 개들에게 찢겨 죽은 자들~.'

이렇게 인디오 편에서 잘 나가던 라스까사스가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편지에 다음 구절을 보탠 것이다. '개척자들은 인디오 대신에 흑인이나 무어인 노예를 데려와 부리던지 아니면 손수 일을 하게 해서 인디오들을 해치지 않게 해야 한다'라는 구절이다. 이러니 인디오들에게는 '성자' 소리를 듣지만 흑인들은 라스까사스 얘기만 나오면 딴 데를 본다.

어쨌든 라스까사스 신부 등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투쟁으로 노예로 전락했던 인디오들은 1542년 서류상으로 자유를 찾게 되었다.

인디오가 서류상으로 자유를 찾고 몇 년 후인 1545년 볼리비아에서 막대한 양의 은이 매장되어 있는 포토시 광산이 발견되었는데 원주민들이 채광 노역을 거부한다 하여 50명이나 처형되었다. 당시 인디오들이 광산에 노역자로 끌려간다는 것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노역자로 끌려간 집에서는 끌려갈 때 장례식을 치렀다. 이게 바로 서류상의 자유였다.



1530년 라스까사스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관한 최초의 인류학 보고서인 '변증적 역사 개관론'을 썼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 정책에 반하는 라스까사스의 관점은 심한 반발에 부딪쳤고 라스까사스는 자신의 저서를 자신이 죽은 지 40년이 지난 후에 출간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의 책은 20세기 초인 1909년이 될 때까지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소개된 적이 없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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