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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필, 앙드레 프레빈 유작으로 가을 시즌 오픈

창립 100주년 맞아 의뢰
음악계 예상 깨고 작곡 수락
죽음 앞둔 상황에서 완성

앙드레 프레빈

앙드레 프레빈

여배우 미아 패로와 함께 살던 무렵의 앙드레 프레빈이 자신의 아이 3명과 월남에서 입양한 두아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배우 미아 패로와 함께 살던 무렵의 앙드레 프레빈이 자신의 아이 3명과 월남에서 입양한 두아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달 28일 세상을 떠난 세계적 지휘자 앙드레 프레빈의 유작이 오는 가을 LA 필의 시즌 오프닝 무대에 오를 계획이라 음악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 음악은 창립 100주년을 맞은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프레빈에게 작곡을 의뢰한 곡. 곡에 대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LA 필하모닉의 가을 시즌 오프닝 콘서트에서 뮤직 디렉터 구스타보 두다멜의 지휘로 연주될 예정이다.

그동안 프레빈과 LA 필은 감정이 좋지 않은 미묘한 관계를 유지해 왔기 때문에 사실 LA 필이 곡을 의뢰했을 때 주변에서는 그가 수락할지 조차 조심스레 지켜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프레빈은 자신이 한때 뮤직 디렉터로 활동했던 LA 필의 의뢰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죽음을 앞둔 힘겨운 상황에서도 사투를 벌이며 이 곡을 완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LA 필하모닉과 프레빈의 미묘한 관계는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츠버그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뮤직 디렉터직을 막 끝낸 프레빈은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용되면서 동시에 LA 필하모닉의 뮤직 디렉터가 되었다. 당시 LA 필하모닉을 이끌던 사람은 어니스트 플레이시먼. LA 필의 매니징 디렉터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그는 클래시컬 뮤직계 정통 음악인으로 경영 측면에서도 재능을 인정받으며 LA 필을 세계적 수준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장본인이다.

처음 두 사람은 매우 죽이 잘 맞는 관계였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가정 출신이라는 공통 분모로 서로를 잘 이해하는 듯 했으나 각자 다른 음악 노선에서 의견이 빗나가기 시작했다.

재즈와 영화 음악 분야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던 프레빈과 달리 플레이시먼은 정통 클래시컬 뮤직을 고집하는 클래식 맨이었다. 결국 플레이시먼은 당시 유럽에서 센세이셔널을 불러일으키고 있던 젊은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을 프레빈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용했다. 이 사실을 안 프레빈은 분노가 폭발, 당시 계획 중이던 일본 순회 공연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살로넨의 수석 객원지휘자 임용 역시 수포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다.

이후 두사람의 밀고당기는 관계는 1989년 프레빈이 사표를 던지고 LA 필을 떠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다. 프레빈이 떠난 후 4개월 만에 LA 필은 전격적으로 살로넨을 뮤직 디렉터로 기용했으며 이후 살로넨은 공식적으로 1992년부터 뮤직디렉터로 LA 필의 지휘봉을 잡기 시작했다.

LA 필을 떠나며 프레빈은 '내 눈에 흙이 들어올 때까지 다시는 LA 땅을 밟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프레빈은 이후 LA를 방문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는 상황에서도 절대 LA 공항을 경유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프레빈이 미국에 이주하며 첫 정착한 곳이 LA였고 영화음악에 깊이 빠져 할리우드가 있는 LA를 깊이 사랑했던 만큼 LA 필을 깊이 사랑한 그가 심하게 배신감을 느낀 결과가 아닐까 주변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LA 필로부터 작곡 의뢰를 받고 이를 수락한 그의 의도는 분명 LA 필과의 화해를 원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재즈에서부터 오페라에 이르기 까지 엄청나게 다양한 곡을 창작한 위대한 작곡가였으며 역사에 남을 마에스트로였던 프레빈이 남기고 간 곡이 과연 어떤 색으로 LA 필 무대에 오를지 전세계 음악팬이 주목하는 것도 바로 LA필과 프레빈의 30여년에 걸친 미묘한 관계 때문이라고 평자들은 해석한다.


영화음악과 클래식 장르 초월한 거장

앙드레 프레빈은

세계적 지휘자이자 작곡가였던 앙드레 프레빈(Andre Previn:1929 4월6일~2019년 2월28일)은독일의 유대계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나치의 압제를 피해 가족과 함께 1938년 미국으로 이민, LA에서 정착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할리우드 MGM의 스튜디오 녹음실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피아노 . 지휘 . 작곡을 전공한 이후 1948년부터 할리우드에서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한동안 영화 음악과 재즈에 심취했으나 곧 클래식 뮤직으로 눈을 돌려 1967년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시작으로 1968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뮤직디렉터로 임명되면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교향악 서곡을 포함 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피아노곡, 성악곡, 실내악곡, 오페라 등 엄청나게 다양한 클래식 뮤직을 작곡한 그는 주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지낸 1995년 이후 다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팝 음악계로 돌아왔다.

소프라노 실비아 맥네어와 뮤지컬 작곡가 제롬 컨의 곡을 재즈로 재해석해 출반한 음반들은 여전히 베스트셀러로 사랑받고 있다.

뮤지컬 '지지'와 '포기와 베스' , '마이 페어 레이디' 등의 영화음악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그는 그래미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특별히 프레빈은 음악적 다양성만큼이나 결혼 생활이 화려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두 5번 결혼 한 그는 결국 다섯 번째 아내였던 34세 어린 독일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와 결혼 4년 만인 2006년 이혼하고 말년에는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안네-소피'라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해 헌정하며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던 프레빈은 이혼 후에도 함께 연주회를 열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가 한인 커뮤니티에 친숙한 것은 셋째 아내였던 여배우 미아 패로와 한국의 고아 출신 순이를 입양하면서부터. 그는 미아 패로와 3명의 아이를 낳았고 월남 출신을 포함 모두 3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순이 프레빈은 이후 패로의 연인이었던 감독 우디 앨런과 사랑에 빠져 결혼해 세계적 주목을 모았다. 이때 프레빈은 "우리에게 이제 순이라는 존재는 없다"며 순이의 행동에 분노를 표하며 패로의 아픔을 위로했다.


유이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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