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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글동산: 안문자(한국 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회원)


아버지의 기일

우리가 먼저 도착했다. 가을비 속에 속수무책인 뾰족한 지붕이 흠뻑 젖어있었다. 아버지의 사랑과 막내 동생의 예술로 빚어진 비석이 먼지와 빗물로 얼룩져 있다니. 괜한 일인 줄 알면서도 싸-한 가슴으로 빗물을 쓸어 낸다.

다음으로 도착한 조카 부부가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이모님 안녕하셨어요?' 조카며느리는 언제나 살갑다. 그녀는 내가 들고 있는 분홍 꽃다발을 보더니 얼른 흙속에 박혀 있는 무쇠 꽃병을 들고 수돗가로 향한다. 비는 점점 더 세게 뿌린다.

12년 전, 그날도 비가 억수로 쏟아졌는데.....울적한 마음으로 회색빛 하늘을 올려본다. 아버지가 묻히시던 그 시간, 장대비가 줄기차게 쏟아 졌다.

슬픈 마음을 감싸고 있던 상복 위로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쳐 더 슬펐다. 그날의 억수 비는 우리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흔들었고 가족들은 흐르는 눈물을 빗줄기로 씻으며 아버지를 가슴에 묻었다,



차례로 동생들이 도착한다. 아버지의 둘 째 아들은 물이 가득한 양동이와 솔을 들고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다가온다. 그는 비석에 물을 붓고 솔로 닦는다. 사뭇 엄숙한 손놀림이다. 우리 모두는 우습기도, 슬프기도 한 분위기가 되어 잠시 조용해진다. 구석구석 쌓여있던 먼지가 검게 흐르며 샤워하듯 씻겨나간다.

그리운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이리라. 비석은 말쑥한 얼굴이 되었다. 한결 위로가 된다. 사방을 휘 둘러본다. 그새 비석들은 더 늘어 나, 크고 작은 여러 모양의 돌들이 빼꼭하다.

저 멀리 천막이 쳐진 것을 보니 내일 쯤 어느 누가 또 묻히려나보다. 비를 맞고 있는 수많은 꽃들의 표정이 쓸쓸하다. 반쯤 시든 꽃들은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자기의 임무는 여기 묻힌 주인을 위해서 오랫동안 피어있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우리는 우산을 들고 둥그렇게 섰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찬송의 하나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를 조용히 부르고 아버지의 첫아들이 기도를 한다. 아버지가 살아오신 삶은 고난의 역사였다.

험난했던 시대의 소용돌이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로지 어린이 교육을 위해 헌신하신 성공의 일생은 주님과 동행하신 삶이었으며 그토록 뜻 깊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을 감사했다. 또한, 평생 우리들에게 주셨던 교훈과 사랑도 감사하다고 울먹인다.

이제 우리들은 황혼에 섰지만 아버지의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존경스러운 인생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간절히 기도하니 우리들의 아멘에 따뜻한 위로가 등을 두드려 준다.


나는 아버지의 12주기가 다가오자 문득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우리 아들, J를 생각했다. 그는 지금 할아버지의 기일을 기억하고 있으려나? 할아버지와 손자가 나누던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김 하려고 그가 할아버지를 추모하며 쓴 글을 찾아 읽었다. 글의 일부다.

'할아버지께서 이룩하신 많은 업적들 중에서 사람들이 첫째로 꼽는 것은 기독교 교육자로, 아동문학가로서 하신 일이다. -중략- 물론 나는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존경하는 목사이며 저술가이신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알고 존경한 할아버지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할아버지의 열정, 권위, 매력을 사람들에게 상세하게 표현 할 수 없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손자 손녀들에게 참 좋은 할아버지였다는 것이다. -중략- 나는 할아버지의 저서를 읽으며 할아버지께서 글로 발표 하시는 내용과 할아버지의 일상생활이 일치한다는 것을 느낀다.

한번은 <이민과 교육> 이라는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서 '교육은 인간이 인간되게 하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말씀대로 대화로, 편지로, 그리고 생일이나 졸업축하 카드 등을 통해 좋은 글로 우리를 교훈 하셨다.

-중략- 할아버지께서는 부드러우면서도 옳고 그른 것에 뚜렷하셨고, 겉보기와는 달리 단호하셨으며, 언제나 미소를 띠우시면서도 엄격하셨다. -중략- 나는 할아버지와 더 이상 배우며 대화할 수는 없는 것이 아쉽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대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한 그 대화는 내 마음속에 계속 살아남아 있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셔서 손자가 쓴 이 글을 읽었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참으로 아쉽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나신 K목사는 또 이렇게 글에 쓰셨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이, 세상의 모든 할아버지들이 그처럼 자손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일이 명령으로 되겠습니까? 요청으로 이루어지겠습니까? 안성진 목사님께서 평생토록 아름답게 사신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K목사님은 어느 해 머킬티오의 아버지 집에서 몇 달을 함께 지내신 일이 있었다. 두 분의 깊으면서도 재치가 번쩍이던 대화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곳에 어머니도 함께 묻히셨다. 우리 형제들은 기념일마다 찾아와 비석을 닦고, 꽃을 꼽은 후, 찬송하고 기도하며 조용히 머리를 숙인다.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 뽀얗게 안개 낀 묘지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너무 고요해 적막감만이 감돌고 있는 것 같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곳은 영원한 생명이 흐르는 곳임을. 무의미한 것 같지만 편견과 오해와 미움이 뛰어넘는 곳, 공의로운 손길로 거두시고, 일으켜 주시는 곳, 언제나 눈부신 부활의 아침 같은 곳.....가을비는 성령의 꽃비가 되어 그리움에 젖은 우리를 위로해 준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인가보다. 모두들 추워서 떨고 있다. 우리는 우르르 조카의 신혼집으로 갔다. 조카며느리는 따끈따끈한 붕어빵을 사왔다. 우리 집에서 누구누구는 누구누구와 완전 붕어빵이야! 하하하.

신기한 듯 붕어빵을 들여다보며 잠시 왁자지껄. 다시 모여 앉았다. 2014년 12월18일에 있을 안 씨네 음악회인 <크리스마스 콘서트> 를 위한 준비 모임으로 이어졌다. 유수와 같은 세월, 어느덧 20회를 맞게 되다니.....새로운 감격에 젖는다. 붕어빵처럼

우리들은 서로 닮았다. 붕어들의 따끈함과 달콤함이 음악 이야기와 섞여지니 가슴과 가슴은 감사로 연결되고 풀어졌던 매듭은 다시 매어졌다. 화기애애한 안씨네의 '이상'이 새로운 희망으로 서서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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