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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저택 매매 비화]'한국판 비벌리힐스'

[밴쿠버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6/10/23 11:38

`돈만으로는 살 수 없는 `자존심의 城

절대권력.만석꾼 길에 나앉기도`

1. 전직 대통령 부부는 성북동에 집을 사러 왔다 그 집 안주인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집을 사지 못했다.
안주인은 함께 집을 보러 온 대통령의 딸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며 집을 못 팔겠다고 했다.


2. 살던 집을 팔려다 작은 문제가 생겼던 J그룹 C 회장은 일이 마무리된 뒤 난데없이 운전기사를 해고해 버렸다.
그가 C 회장 집에 생긴 문제를 친구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이 회장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3. 집 주인들은 부동산에서 "원하는 가격보다 더 받아줄 테니 복비를 더 달라"고 하면 가차없이 거래를 끊는다.
"돈 몇 푼 더 받자고 나더러 협잡질을 하자는 거냐"는 것이 이유다.


하늘이 낸 부자들만 산다는 동네 서울 성북구 성북동. 이곳의 대저택들은 웬만한 부자들도 소유는커녕 구경 한 번 해보기도 힘든 집들이다.
이들 집의 주인들만큼이나 파란만장한 내력을 <월간중앙>이 공개한다.


성북동에는 없는 것이 많다.
우선 고층건물이 없다.
주민들이 스스로 제1종 주거전용지역으로 묶어줄 것을 요청해 높은 건물은 지을 수 없다.
서울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조망권을 함께 누리자는 합의가 만들어낸 결과다.


또 택시를 빼면 대중교통이 전혀 없다.
마을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흔히 알려진 성북동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변두리'까지만 운행한다.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다.


다소 가파른 언덕길 골목마다 고급 승용차들만 오갈 뿐 인적을 찾기란 어렵다.
때문에 외부인이 이 동네에 잘못 발을 들였다가는 한참을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다.
집집이 높이 쌓아올린 담장과 그 위로 고개를 내민 감시 카메라들이 이곳이 '대한민국 부촌 1번지' 성북동임을 말해준다.


대부분 문패도 없는 두터운 철문 속 저택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기업 회장과 저명인사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성처럼 둘러친 담장 너머를 들여다보지 않고도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있다.
정한술 평화부동산 대표. 그는 성북동에서 40년 넘게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동네 유지'다.
비록 성북동 초입의 사무실은 초라하기 그지없고, 대저택을 소유한 것도 아니지만 성북동에서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니, 그가 모르는 성북동 주민이 없다고 해야 옳겠다.


그는 성북동 대저택 중 들어가보지 않은 집이 거의 없다.
번지수를 댈 필요도 없이 집 외관만 설명해도 누구 소유며 현재는 누가 사는지 훤하다.
보통사람들은 일생에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저명인사들을 그는 옆집 아저씨 보듯 한다.
심지어 기자가 "저런 집들은 내부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다"고 하자 대뜸 자동차 열쇠를 집어들며 "갑시다" 하며 나선다.


그는 모 대기업 회장 아들의 집으로 안내했다.
정원수와 잔디를 새 단장 중인 그 집은 대문이 열려 있었다.
정 대표는 "아무 말하지말고 고개만 끄덕이시라"고 귀띔한 뒤 집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남의 집, 그것도 대기업 회장의 아들네 집이라는 설명에 대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기자가 머쓱해진 순간이었다.


그는 정원사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을 했다.


"이 집은 이 동네 어떤 집보다 관리가 잘 된 집입니다.
전망도 뛰어나죠. 이 나무는 30년이 넘은 감나무인데…."

전직 대통령 부부, 집 사러 왔다 '헛걸음'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이다 시원스레 펼쳐진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부터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산과 경복궁, 과장을 좀 보태면 남대문까지 발 아래 놓인 기분이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성북동 저택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었다.
먼저 "여태까지 거래해 본 인사 중 제일 거물급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전직 대통령의 이름이 나왔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 집을 사러 왔다 딸 때문에 거래가 성사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몇 년 전 검은색 승용차 몇 대가 그의 사무실 앞에 멈춰 서더니 정장을 입은 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고 한다.
남자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사람은 전직 대통령의 처남. 정 대표는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 인물이어서 그를 한눈에 알아봤다.


여러 대의 승용차 중 한 대에는 누군가 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 매물로 나온 집이 있으면 보여 달라는 그에게 정 대표는 대지 300평쯤 되는 저택을 보여줬다.
그는 집을 둘러본 뒤 아무 말 없이 그냥 돌아갔다.


다음날, 사무실로 들어서는 노부부와 젊은 여성을 보고 정 대표는 눈을 의심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 부부와 그 딸이 직접 찾아온 것. 웬만한 유명 인사는 지겹도록 봐온 그였지만 이날 만큼은 정 대표도 등에 식은땀을 꽤 흘렀다고 한다.


그는 세 사람을 다시 그 집으로 안내했다.
당시 전직 대통령의 딸은 얼굴을 가리려는 듯 시종 큰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는데, 유독 당당한 행동거지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전직 대통령 부부는 집을 꼼꼼히 둘러본 뒤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들이 사라지고 난 뒤 집 소유자의 부인이 조용히 정 대표를 불렀다.
그녀는 대뜸 "집 못 파니 그리 아세요"라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방금 왔다 간 그 아이 사돈 집안 사람이에요. 아니, 집안 어른을 만났으면 인사를 하는 것이 도리이지. 선글라스도 안 벗고 팔짱만 끼고 있는 아이한테 집을 팔라는 겁니까? 내가 돈이 아쉬운 사람도 아니고, 이런 모욕을 당하면서 집 팔 생각 없으니 거래는 없던 일로 하세요."

정 대표는 당시 전직 대통령에게 주인이 집을 못 파는 이유를 둘러대느라 혼이 났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저명 인사의 집 때문에 최근에도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
과거에 비해 지금은 사세가 많이 위축된 J그룹 C회장이 집을 팔겠다고 내놨다.
이웃에서 그 사실을 알고는 집을 사겠다며 C 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C회장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해서 집을 팔기로 구두로 약속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정 대표에게 알리지 않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당시 정 대표는 집을 구하러 온 또 다른 사람에게 C회장의 집을 보여줬다.
그는 집을 둘러본 뒤 너무 마음에 든다며 곧바로 계약금을 걸어 버렸다.
집을 계약한 사람은 요즘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인기 연예인 S씨. 정 대표는 집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섰다고 C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일이 꼬인 것을 알게 됐다.


C회장은 이웃에 집을 팔기로 했는데 무슨 소리냐며 정 대표에게 "일을 그렇게 처리하면 이웃에서 나더러 실없는 영감이라고 할 텐데 어쩌려고 이러느냐. 내가 직접 이야기할 테니 S의 연락처를 달라"고 역정을 냈다.
정 대표는 C회장을 겨우 달래 놓은 뒤 S씨에게 연락을 취해 혹시 전화가 오더라도 절대 싸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집 팔다 문제 생겼다" 운전기사 해고 사건

"보통사람들 같으면 돈을 더 주는 쪽에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죠. 그렇지만 이 동네 회장님들은 약속을 목숨처럼 중시하는 분들이에요. 말 한마디가 곧 법이라고 생각하는 양반들이죠. 우리로서는 다소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대기업 회장을 상대로 따질 수도 없는 처지여서 꼼수를 내 겨우 일을 수습했습니다.
"

정 대표를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은 평소 친분이 있던 C회장의 비서실장. 비서실장은 C회장의 집안 대소사를 챙길 때 도움을 많이 받았던 정 대표를 위해 자신이 중간에서 일 처리를 잘못한 탓이라며 회장에게 '허위 자백'을 했다.
C회장은 비서실장을 크게 나무란 뒤 별다른 조치 없이 용서했는데, 이 작은 사건의 불똥은 엉뚱하게도 C회장의 운전기사에게 튀고 말았다.
C회장의 운전기사가 이 일을 지인들에게 말한 사실이 발각돼 결국 해고당하고 말았다.


어렵사리 일이 수습된 뒤 그 집은 결국 S씨가 사들여 지금 집 수리를 진행 중이다.
S씨는 11월에 입주할 예정인데, 그는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여러 차례 술을 샀다는 것이 정 대표의 말이다.


정 대표가 들려준 이야기들에서는 소위 '작은 부자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성북동 부자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읽을 수 있다.
이들은 집을 치부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돈 몇 푼 더 받겠다고 집에 관해 자존심을 꺾거나 꾀를 부리지 않는다.
정 대표의 말을 빌리자면 "절대 집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북동 집이 팔릴 때는 불법적이거나 원칙에 어긋나는 거래가 발생하는 일이 거의 없다고 한다.
강남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운계약서(거래가격을 거짓으로 낮춰 쓴 계약서)나 호가 부풀리기 등은 이곳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다.


"성북동 저택에 정해진 시세가 어디 있습니까? 집 주인이 부르면 그게 그냥 가격이죠. 그런데 희한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집을 내놓는 분들이 대부분이 비슷한 값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어디처럼 반상회 열어 담합하는 것도 아닌데 대부분 적정하다 싶은 가격에 집을 내놔요. 게다가 다른 동네 사람들이 보면 이해하지 못할 법한 것이 또 있습니다.
집주인이 처음 부른 값에서 한푼도 더 받을 생각을 안 한다는 겁니다.


예컨대 강남이라면 집 주인이 20억 원에 팔겠다고 내놓으면 부동산에서 22억 원 받아줄 테니 추가로 받는 2억 원 중 1억 원을 달라는 식으로 유도하는 경우가 제법 있어요. 그런데 이 동네 집주인들한테 그런 소리 했다가는 이상한 놈 취급받기 딱 좋습니다.
'돈 몇 푼 더 받자고 나더러 협잡질을 하라는 말이냐'는 식이죠."

그래서 그는 집을 사고 팔 때 아예 '머리 굴릴' 생각을 안 한다고 했다.


"괜한 꼼수 부려 봐야 자기 무덤 파는 겁니다.
이 동네 회장님들 많게는 종업원 수만 명씩 상대하면서 일하는 분들인데, 눈빛만 봐도 상대방이 무슨 꿍꿍이인지 금방 알아요."

그는 성북동 집을 중개하면서 안타까운 사연도 많이 봤다고 했다.
폭설이 내리던 어느 겨울날 집을 구하러 왔던 정치인 J씨의 부인도 그런 경우다.
J씨는 서울 모 지역구에서 오랫동안 국회의원을 지냈고, 현정부 출범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 몇 해 전 J씨가 좋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감옥에 있을 때 그의 부인이 정 대표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날 눈이 엄청나게 왔어요. 이 동네는 언덕이 많아 눈이 오면 도로가 통제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일찍 문을 닫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웬 여성분이 사무실로 들어오더군요. 차림도 멀쩡하고 참 단정해 보이는 사모님이었는데, 집을 구하러 왔다면서 보여줄 집이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마침 나와 있는 집은 있습니다만, 이런 날 꼭 집을 보셔야 하는지요' 했더니 먼저 가격부터 묻더군요. 그래서 25억 원에 나왔습니다 했더니 더는 말을 못하고 주저주저하며 어찌할 줄 모르더군요"

정 대표는 더 묻지 않아도 뭔가 사연이 있음을 눈치채고 그의 자존심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내가 '사모님, 집은 인연이 닿아야 자기 것이 됩니다.
아무 걱정 마시고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지 말씀해 주세요'했더니 가진 돈이 모자란다며 울상을 짓더군요. 그래서 얼마나 갖고 계신지 말씀해 주시면 무조건 그 가격에 맞춰 집을 구해 보겠다고 했더니 한참을 망설이다 2억 원 뿐이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군요.

그래서 '무조건 갖고 계신 돈에 맞춰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다려 보십시오'라고 주저앉혀 놓고 사방으로 수소문해 결국 2억 원짜리 집을 찾아냈습니다.
물론 대저택은 아니었지만 운치 있는 작은 주택이었어요.

그래서 내 차를 타고 같이 집을 보러 갔는데, 이 양반이 갑자기 차 안에서 펑펑 우는 겁니다.
그래서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제야 사실은 자기가 J 의원 부인인데, 남편은 감옥에 들어가 있고 자신는 겨우 돈 2억 원 들고 성북동에 집 산답시고 와있는 것이 너무 한심하고 화가 나서 그런다고 털어놓더군요."

유명정치인 "지역구 못 떠난다"며 계약 포기

그는 이름깨나 날리던 정치인인 J씨의 재산이 그처럼 적은 것을 알고 꽤 놀랐다.
정치인 중 돈 모으는 재주가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고 한다.


선대부터 만석꾼 집안 출신인 J씨는 어릴 때부터 돈 귀한 줄 모르고 주변 인사들에게 뭉칫돈을 집어줬다는 것이 부인의 말이었다.
그는 돈 관리도 부인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했다는데, 감옥에 가고 나서야 통장이 부인의 손에 들어왔다는 것.

J씨의 부인은 결혼 후 처음으로 은행에서 통장 잔고를 확인해 봤다는데, 통장에 남아 있는 금액이 덜렁 2억 원뿐이었다고 한다.
J씨 부인은 설마 하는 마음에 남편에게 면회를 가서 숨겨놓은 돈이 있으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J씨는 "당신한테 준 통장에 전 재산 다 들어있는데 숨겨놓고 말고가 어디있느냐"더라는 것이다.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는 알고 하는 소리냐는 부인의 물음에 J씨의 대답은 "내가 그런 건 알아서 뭐하느냐"였다고 한다.


정 대표는 J씨의 부인을 달랜 뒤 집을 구경시켜줬다.
부인은 집을 보고 나서 너무 마음에 든다며 내일 당장 와서 계약하겠다며 돌아갔다.
그런데 그는 한참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다가 한 달 정도 뒤에야 다시 찾아왔다.


J씨의 부인은 정 대표에게 머리를 숙이며 "정말 미안한데 남편이 너무 반대해 도저히 안 되겠다"고 사과한 뒤 돌아갔다.
당시 자신의 지역구에 살고 있던 J씨는 감옥 안에서 부인의 이사 계획을 전해들은 뒤 "내가 명색이 OO구 국회의원인데 어떻게 성북구로 이사를 한다는 말이냐"며 극력 반대했다고 한다.


성북동은 평소 자동차 지나다니는 소리 외에는 집 안팎에서 큰 소리가 나는 법이 없는 조용한 동네다.
그런데 외환위기 당시 성북동에서 유독 시끌벅적했던 집이 있다.
별명만 들어도 웬만한 경제인은 다 알 만한 국내 사채시장의 큰손 중 큰손 A씨의 집 앞에는 돈을 빌리려는 기업인이 줄을 서서 면담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A씨는 사채시장뿐만 아니라 국내 건설경기도 좌지우지할 만큼 부동산시장에서도 위력을 발휘했는데, 정 대표는 하루아침에 몰락해 집까지 팔아야 했던 그의 거짓말 같은 부침도 지켜봤다.


몇 해 전 A씨가 "집이 경매에 넘어가게 생겼으니 급히 팔아달라"며 정 대표를 찾아왔다.
A씨는 벤처 거품이 한창이던 시절 주식에 손을 댔다 천문학적인 돈을 날렸다.
그는 주식거래로 입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사들인 주식을 담보로 대출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한때 '걸어다니는 한국은행'이라고 불릴 정도로 현금 동원력이 막강했던 A가 돈을 빌려야 했다는 말이었다.
당시 A씨는 이미 재산관리를 하던 아들의 회사가 부도나는 사태까지 맞고 있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성북동에 살면서 돈도 권력도 다 덧없는 욕심이라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 정권 시절 삼청각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들려줬다.


잘 알려진 대로 삼청각은 박 전 대통령이 성북동에 건립한 고급 요정. 삼청각 건설은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지휘하에 H건설이 맡았는데, 정 대표에 따르면 당시 모 경호실장이 H건설 회장에게 "각하께서 삼청각에서 보내시는 시간이 많은 만큼 경호를 위해 삼청각 근처에 집이 필요하니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H건설 회장은 집을 지어주기는 했지만 이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1979년 10월26일 10.26사태로 정권이 무너지자 불과 사흘 뒤 H건설은 집을 몰수해 버렸다.
그 경호실장에 대한 H건설 회장의 미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채시장 큰손 주식에 손댔다 집 날려

성북동 주택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은 최근에도 있었다.
K그룹 L회장이 집 앞에서 모친에게 크게 꾸지람을 듣는 장면이 주민들에게 목격된 것. L회장은 이날 술에 취한 채 모친에게 연방 고개를 조아리며 잘못을 빌었다고 했다.


모친이 장성한 아들을 혼낸 것은 그룹 경영이 큰 어려움에 빠져 있는데도 회장이 주색잡기에 빠져 회사를 돌보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모친은 L회장에게 "할아버지의 나쁜 버릇이 어떻게 한 대를 건너뛰어 네 녀석에게 갔는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는데, 사연이 있는 이야기다.


그의 집안은 역사가 깊은 부잣집으로, L회장의 조부는 술과 여자를 지나치게 탐해 주변의 지탄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이자 K그룹 창업주인 L명예회장은 아버지의 그런 점이 부끄러웠고, 이 때문에 평생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여자를 멀리하며 살았다.
L명예회장은 몇 해 전 경영권을 L회장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그때부터 L회장이 본격적으로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것.

그럼에도 L명예회장 부부는 아들에게 일절 잔소리를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는데, 최근 들어 그룹 경영이 급속히 악화하자 마침내 모친이 매를 들게 됐다는 이야기였다.
L명예회장과 L회장은 담장을 마주하는 바로 옆집에 살고 있어 모친이 밤이슬이 맞으며 아들의 귀가를 기다렸다 혼을 낸 것이라고 한다.


정 대표는 "성북동에서 자식교육 잘못된 집이 별로 없는데 참 별난 집안"이라고 전했다.
그는 성북동 저명인사들은 대부분 자식의 인성교육이 대단히 엄격하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B그룹 H회장 가문은 성북동에서도 인품이 높기로 소문나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H회장 자녀들은 검소함과 인사성이 몸에 뱄다는 것.

H 회장은 자녀들에게 필요한 학용품이나 준비물이 있으면 절대 돈을 주지 않고 물건을 직접 사서 줬고, 용돈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택시를 타고 집에 올 수 있을 정도만 줬다.
정 대표는 H회장이 성북동에 집을 구할 때 중개한 인연으로 그의 자녀들 집까지 물색해 줬는데, 이사 뒤 H 회장의 자녀들이 회사로 정 대표를 여러 차례 초대해 식사를 함께했다고 한다.


대부분 성북동 주민들의 자녀 교육방식도 H회장과 크게 다르지 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성북동 주민의 자녀들이 다니는 H유치원생들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대기업 회장집 자제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예컨대 강남의 일부 사립유치원들의 경우 유치원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면 수입차들이 유치원 앞을 가득 메우지만, H유치원은 셔틀버스만 기다리고 있을 뿐 아이를 데리러 온 부모나 비서는 보기 힘들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유치원이 보통 2시쯤 끝나는데, 그때 동네 한바퀴 돌아보면 집앞에서 기다리다 아이를 데리고 들어가는 사모님 수 없이 볼 수 있습니다.
강남 같으면 가정부나 비서가 나와 있겠지만, 이 동네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아이들 마중은 엄마가 직접 합니다.
"

그래서인지 성북동에는 '치맛바람'이 없다.
아이들 문제에 부모가 개입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분위기다.
상대가 어느 집 자제인지도 모르고 어설프게 설레발을 쳤다가는 망신당하기 십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한번은 H 회장의 손자가 다른 집 아이와 다투는 바람에 얼굴을 다친 적이 있는데, H회장의 며느리는 아들을 때린 아이를 직접 만났음에도 씩씩한 아이라며 칭찬만 하고는 돌아섰다고 한다.
자기 자식이 맞아 상처가 났으니 속으로는 얼마나 약이 올랐겠는가? 그런데도 몸에 밴 인성 덕분에 감정을 억누를 수 있었던 것이다.


주색잡기 탐하던 L회장, 집앞에서 모친에게 혼쭐

그러나 성북동의 분위기도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 정 대표의 말이다.
옛날 같으면 동네 망신이라던 외제 스포츠카가 가끔 보이기 시작했고, 연예인들이 부쩍 이사를 많이 온단다.
다만 나이 많은 연예인은 성북동에 들어오는 사람이 거의 없다.


영화배우 Y씨, 탤런트 J씨 등 젊은 연예인이 제법 성북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대부분 옆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한 지역에 밀집해 살고 있다.


"내 생각에는 나이 든 연예인들은 '감히' 회장님들 사는 동네에 들어가 살 엄두를 못 내는 것 같습니다.
요즘이야 웬만한 인기 연예인은 대기업 회장 부러울 것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그룹 회장님과 연예인은 하늘과 땅 차이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즘 젊은 연예인들은 그런 시절을 모르니 그냥 들어와 사는 것 같습니다.
"

그는 사실 연예인들이야 사회적 물의를 빚는 인물만 아니라면 별문제 없지만 몇 년 전 이사 온 거물급 국제 무기상처럼 '어둠의 세력'이 성북동에 들어오는 것은 별로 반갑지 않은 현상이라고 했다.


몇 해 전 대기업 창업주 S회장이 타계하자 B씨가 그 집을 사들여 입주했는데, 정 대표에 따르면 그는 국제 무기 거래에 깊숙이 관여하는 인물이라는 것. B씨가 사들인 S회장의 집은 그가 타계한 후 아들이 직접 와서 내놓았다고 한다.
대지면적이 400여 평에 이르러 성북동에서도 꽤 큰 축에 속하는데, 특히 전망이 빼어난 집이다.


이런 집을 팔면 소위 '복비'라고 불리는 부동산 중개 수수료는 얼마나 받을까? 법적으로 고가 주택의 중개수수료는 매매금액의 0.2~0.9%에서 중개업자와 소비자의 합의로 정하도록 돼 있다.
30억 원짜리 집을 팔면 중개업자는 최소 600만 원에서 말만 잘하면 최고 2,700만 원까지 복비를 챙길 수 있다.


그런데 정 대표는 40년 넘게 대저택을 사고 팔면서 한 번도 협상해본 적이 없다.
잔금을 치르고 나면 안주인이나 비서실장이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임의로 정한 금액을 건네준다.
심지어 20억 원짜리 집을 팔고 50만 원을 주는 대기업 회장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잘못 들으면 성북동 사람들을 수전노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게 아니라 돈 귀한 줄 알기 때문"이라고 했다.


"성북동으로 집을 사러 오시는 회장님들한테는 그저 주는 대로 조용히 받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 분들은 집을 한 채만 덜렁 사고 끝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다른 동네 살던 회장님이 성북동에 집을 사서 들어오면 얼마 안 돼 아들.딸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오는 것이 보통이죠. 근데 첫 거래에서 복비 적다고 투덜거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령 10원을 주더라도 그저 '고맙습니다'하고 군소리 안 하면 최소한 집 두세 채는 더 판다고 봐도 돼요. 물론 집 몇 채 더 살 때도 뭉칫돈 퍽퍽 집어주는 법은 없죠. 그냥 본인들 이름이 부끄럽지 않을 수준으로 줄 뿐이지만 몇십 년 동안 회장님들이 나를 찾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그분들한테 작은 욕심을 버리면 큰 것을 얻는다는 교훈을 배웠죠."

월간중앙 정일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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