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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삶] 너희들은 나를 유색인이라고 해

태어날 때 나는 검은 색이고/ 자라면서, 나는 검은색이고/ 야외에 나가도 나는 검은색이고/ 내가 겁에 질렸을 때, 나는 검은색이고/ (…) 그리고 너희 백인 친구들은/ 태어나면, 분홍색이고/ 자라면서, 너희는 하얀색이고/ 아프면, 초록색이 돼/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유색인이라고 해

-아프리카 어린이의 시 ‘컬러’ 부분

‘시위’는 활대에 걸어 켕기는 줄인 활시위의 준말이다.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시민에게 알리기 위해 다수의 사람이 시도하는 공개적이고 집합적인 의사표현행위라고 사전은 정의하고 있다.

평화적 시위는 시민들의 보편적 권리를 획득하는 수단이 되고 그 허용 수준에 따라 해당 사회의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폭력이 동반되어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약자들의 목소리 단합으로 민주사회의 행동양식이 되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으로 불거진 항의 시위가 나라를 흔들고 있다. 뉴스를 보는 마음은 불편하다. 폭력이 곁들여져 한인사회가 피해를 볼까 봐 염려스럽기도 하고 저들의 화살이 동양인인 우리에게 날아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다. 그리고 내 안에 감춰져 있는 특정 인종에 대한 옳지 않은 생각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 묻게 된다.

큰딸이 백인 청년을 데리고 와서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했을 때, 백인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신을 안심시키던 내 모습이 되살아난다. 내 포용능력의 한계다. 누군가를 낮춰본다는 건 나의 우월감을 유지하려는 안간힘은 아닐까. 인종차별은 자민족 중심주의와 출발은 같지만, 그것을 능가한다고 한다. 민족적 자부심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저들보다 낫다는 안도감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집단욕망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쓴 철학자 크리스티앙 들러캉파뉴는 말한다. “인종차별이란 타자로서의 타자에 대한 증오이다. 인종차별은 하나의 사고방식이며 감정과 무관한 지적 태도이기도 하다. 그것은 의식될 때도 있지만, 대개는 감춰져 있는 어떤 믿음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인종차별주의자는 없다는 것, 모두 무지에 의해서 인종차별주의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특정 인종을 차별하는 태도는 어떤 방법으로든 학습된 결과이다. 누가 직접 가르쳐준 것은 아닐지라도 집안이나 공동체의 분위기 속에서 배워진 것이리라.

내 안에 감춰져 있는 인종적 차등 두기는 어디에서 근거한 것인가 생각해 본다. 경험에 의해서라기보다 선입견의 발로 아닌가 싶다. 차별을 받기도 하고 행하기도 하면서, 흑과 백 사이에서 이중적 잣대로 안도감을 갖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는 일은 부끄럽고도 씁쓸하다.

‘인종’은 생물학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따라서 인종차별은 비과학적 태도라고 한다. 우월적 인종을 믿는 조악한 인종 우생학적 선구자들에 의해 깊어 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책은 말한다. 타자의 행위가 아니라(젊은이·여자·동성애자·이슬람교도·기독교도 등) 속성에 대한 평판에 근거해서 타자로서의 타자를 증오하는 모든 형태는 이제 인종차별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가끔은 무지해서, 대개는 악의에 의해서. 인간이 인간을 나누고 특정 인간과 집단을 차별하고 증오하는 모든 행위가 인종차별이다. 우리가 부숴야 할 관념은 인종차별은 항상 있었다는 신화를 깨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무지와 싸워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전한다.


조성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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