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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호 역사칼럼] 바다를 헤엄쳐 미국에 온 사나이, 퓰리처

“언론은 제4의 권력이다”라는 말이 있다.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에 이어 네 번째의 권력이라는 뜻이다. 물론 실제로 권력을 행사한다는 뜻은 아니고, 권력만큼이나 막강한 힘을 지닌다는 뜻이다. 막강한 힘을 지닌 언론이다 보니 그 힘을 제대로 행사하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해마다 언론인 혹은 언론 단체 중에 가장 제대로 잘 보도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 있으니 말이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권위가 있는 언론계의 상이 바로 ‘퓰리처상’이다. 퓰리처상은 ‘퓰리처’라는 언론인이 만든 상이다. 퓰리처는 특이하게도 헝가리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공한 언론인이 된 그가 겪은 역경과 그것을 극복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는 지금의 헝가리의 한 시골에서 살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원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에는 가세가 기울며 살림이 어려워져 17세이던 그는 미국에 이민할 생각을 하게 된다. 때마침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일어나서 미국 북군 진영은 유럽에서 미국 군대에 자원할 군인을 모집하고 있었다. 군인으로 자원하면 두둑한 보상금도 준다 하므로 퓰리처는 뒤돌아볼 필요도 없이 미군 모집에 지원하고 수송선에 몸을 맡겼다. 배가 보스턴의 외항에 정박하고 있던 중에 퓰리처는 군인 모집 브로커가 보상금을 거의 다 가로채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바다에 뛰어들어 3마일을 헤엄쳐 미국 땅에 발을 디뎠다. 미국 땅에 간신히 발을 디딘 그는 애초의 생각대로 미군에 자원하여 200달러의 보상금을 받고 북군에 복무하며 남북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쟁이 끝난 후, 고래잡이, 식당 종업원 등 힘든 직업을 갖고 어렵게 살던 퓰리처는 영어 공부에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 어느 날 설탕 농장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친구들과 함께 지원했다. 그런데 직원 모집 광고는 신청 비용을 떼먹기 위해 사기꾼들이 벌인 사기극이었다. 약이 바싹 오른 퓰리처는 이 사기극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글을 써서 세인트루이스의 한 신문에 보냈다. 용케도 신문사에서는 그의 글을 채택하여 신문에 실어 주었다. 그동안 영어 실력이 무서울 정도로 향상되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신문사는 그를 철도회사에 취직시켜 주었다. 운이 좋게도 철도회사는 그에게 변호사가 되라고 지원해 주었다. 마침내 1868년 변호사가 되었으나, 변호사로서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영어 액센트가 너무 강하고 얼굴 생김새가 크게 호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행운이 그에게 찾아왔다. 어느 한 신문사가 그에게 기자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의해 왔다. 신문사의 기자가 된 그는 그 신문사에서 승승장구하여 1872년에는 편집장의 자리에 올랐다. 동시에 그는 신문사의 많은 지분을 갖게 되었다.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정치 활동에서도 상당히 성공을 거두어 1873년에는 미주리주의 하원 의원이 되기도 했다. 몇 년후 그는 본인 몸담고 있던 신문사의 사장이 된다. 경영의 수완을 발휘한 그는 인수와 합병을 통해 신문사의 덩치를 불려 나갔다. 1883년에는 마침내 뉴욕으로 발을 뻗쳐 New York Word라는 신문사들 사들여 곧 미국 최대의 신문으로 키워낸다. 이렇게 언론인으로 크게 성공을 이룬 배경에는 그의 좌우명이 있다고 전해진다.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의 좌우명이다.



퓰리처는 말년에 그의 사업이 다른 신문사와의 소모적인 경쟁에서 밀리는 바람에 크게 고전했다. 그는 1903년에는 언론계에서 손을 떼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 후 1911년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언론계 후배 양성을 위해 남달리 많이 노력했다. 특히 컬럼비아 대학에 신문학과를 설립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는 사망하면서 2백만 달러의 거금을 컬럼비아 대학에 남겼다. 1912년 컬럼비아 대학에는 그의 유언대로 신문학과가 개설되었고, 컬럼비아 대학은 그의 업적을 기려 해마다 특종을 보도한 언론에 주는 퓰리처상을 제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민자의 신분으로 역경에 맞서서 굴하지 않고 이겨내며 성공하여 미국 사회에 도움을 주는 역할까지 해낸 퓰리처야말로 우리 이민자들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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