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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공부하는 아이]원조 조기유학생의 그림자

김윤회 / 공부습관 예스클래스 러닝센터 원장

‘너는 하찮은 농민으로 태어나 불지르고 사람 죽이기를 능사로 여기니, 천인공노할 악질적인 죄인이라. 모든 사람과 땅속의 귀신조차 너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다.’

최치원이 쓴 ‘토황소격문’의 일부입니다. 당나라에서 황소의 반란이 일어나자 신라 출신의 최치원은 토벌군에 참여해서 반란군 수괴인 황소에게 이 글을 보냅니다. 황소는 이 글을 읽고 너무 놀라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최치원은 12살의 어린 나이에 혼자 당나라로 유학한 원조 조기 유학생입니다. 당시 당나라는 최고 수준의 교육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외국인 등용의 통로였던 빈공과라는 과거 시험이 있어서 신라와 신흥 강국이었던 발해를 비롯하여 일본이나 동남아, 멀리 페르시아까지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로 진출했습니다. 당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에는 중국과 외국인 유학생 8000여 명이 공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속에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최치원입니다.

골품제가 있던 신라에서 6두품이 오를 수 있는 관직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6두품 출신의 많은 젊은이들이 유학을 떠났는데 최치원도 그 중 하나입니다. 최치원의 아버지는 12살의 어린 아들을 당나라로 보내면서 10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니 돌아오지 말라고 했답니다. 어쨌든 최치원은 독하게 공부해서 6년만에 수석으로 합격합니다. 18살의어린 나이였습니다.



남보다 빠른 성공을 이뤄냈으나 유학생 출신으로 당나라 주류사회에 편입되는 것은 쉽지 않았나 봅니다. 최치원은 관직을 얻지 못하고 유랑생활을 하다가 2년만에 얻은 관직도 곧 스스로 그만둡니다. 그리고 황소의 난에 참전해 토황소격문을 쓰고 명성을 얻지만 이후 별다른 기회를 얻지 못하고 28살에 신라로 귀국합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익힌 정치적 행정적 경험을 토대로 의욕적으로 신라의 개혁 작업에 참여하고, 새로운 정책들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진골 출신 기득권 세력들의 견제로 결국 꿈을 펼칠 수 없었습니다.

40세 밖에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관직에서 물러난 최치원은 산으로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가 말년에 어떻게 지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가을 바람에 괴로이 시를 읊어보지만 /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는 적네. / 창밖엔 밤 늦도록 비가 오는데 / 등불 앞의 내 마음은 만리 밖에 있네.’ 유학시절 지었다는 그의 시 ‘추야우중’에서 꿈을 펼칠 수 없던 답답한 천재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좋은 교육 환경에서 공부해서 큰 꿈을 펼치기를 기대하며 유학을 보냅니다. 그리고 무언가 성과가 나타나기를 바라며 공부를 재촉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낯선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지금 유학 생활을 하는 어린 친구들에게는 공부에 대한 압박보다 그들이 가진 외로움과 그리움, 두려움에 대한 위로와 공감이 훨씬 더 중요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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