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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 독립운동 현장을 가다-샌프란시스코(상)] 탕…탕…탕…가난한 노동자 장인환·전명운, 3·1운동 불꽃을 심다

워싱턴안창호가 세운 공립협회 점차 확대
하와이 협성협회와 국민회 만들어
"샌프란시스코, 독립운동 기지 의미"

“내 나라 망하고 내 동족이 다 망한 후에 내가 살아 남는다면 어찌 두고두고 후한을 더 기다리리오. 그런고로 그(친일인사 스티븐스)를 쏜 터이니 다시 두 말 할 것 없노라.”

공장·농장 노동자들, 독립자금 모금
상항한인감리교회 매각돼 절로 사용
이대위 총회장, 이민사회 정신적 지주


약 16만 한인들을 대표하는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회관 강당에 전시된 장인환 의사 흉상 위에 걸려있는 그의 어록 중 일부다.

대한민국에서 약 9000km떨어진 샌프란시스코.



성 프란시스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샌프란시스코는 1846년 멕시코령에서 미국에 편입됐다.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꼽히는 이 곳은 하와이와 함께 미주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은 역사지다.

샌프란시스코와 떼 놓을 수 없는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위시로 해외 독립운동의 본부 역할을 했던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가 조직된 곳이며 장인환, 전명운 의사가 친일파 인사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곳이다.

이번 샌프란시스코 특별 취재는 워싱턴 중앙일보와 한국언론진흥재단과의 공동기획으로 하와이에 이어 미주 독립운동의 현장을 되돌아보기 위해 진행됐다.

박병호 전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회장, 권욱순 현 한인회장과 고현숙 한인회 부회장 등이 취재에 도움을 줬다.

◇장인환·전명운 의거, 3·1운동의 불씨 되다

1908년 3월 20일. 중절모를 깊이 눌러쓴 백인 신사가 투숙하려던 페어몬트 호텔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던 한인 노동자 4명이 참았던 울분을 터뜨리며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서 녹을 받으면서 일본을 돕는 너는 우리의 원수다! 한국인은 일본 지배 아래서 행복하다는 망언을 하다니. 취소해라!”

기습공격을 당한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고문이면서 사실상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을사늑약의 배후에 있던 스티븐슨이었다. 그를 때린 4명은 스티븐슨이 일본이 한국을 보호해야 한국이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 기자회견 내용이 샌프란시스코 유력 일간지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에 보도되면서 분개한 공립협회 회원들이었다.

사흘 뒤인 23일 오전 9시 10분쯤. 스티븐슨은 일본 정부와 한국 통감부의 특별 밀명을 띠고 워싱턴DC로 이동하기 위해 오클랜드까지 가는 페리 부두에 도착했다.

군중 속에서 한 젊은 한인 남성이 그에게 튀어 나와 품 속에 숨겼던 총을 꺼냈다. 당시 노무자로서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전명운(1884∼1947)이었다.

아뿔싸! 불발이었다. 급한 마음에 몸싸움을 시작했다.

탕! 탕! 탕!

또 다시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전명운과 몸 싸움을 벌이던 스티븐슨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두 발이 허리와 등을 명중했다.

저격자는 장인환(1876~1930)이었다.

치명상을 입은 스티븐슨은 병원에서 이틀 뒤 숨을 거뒀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출발해 샌프란시스코 공장 노무자로 일하면서 독립운동에 젊음을 바친 이 두 젊은이들의 의거는 한국 민족운동사상 첫 의열 투쟁으로 기록된 ‘상항의거’였다.

박병호 전 샌프란시스코 한인회장은 “전명운, 장인환의 의거가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로 이어지면서 1919년 기미독립운동의 불씨가 됐다”고 강조했다.

103년이 지난 의거 현장은 한 때 조국의 적을 암살했던 ‘비장한’ 곳이라고 보기엔 어려울 정도로 밝은 풍경이었다.

쾌청한 하늘, 눈부신 태양 아래 반짝이는 바다 위로는 갈매기들이 날고 있었고,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거나 커피를 즐기는 등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기자와 동행한 권욱순 현 한인회장은 “지난 주 한인회에서 장인환, 전명운 의거 103주년 기념식을 치렀다”며 “샌프란시스코는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기지 역할을 했던 의미 있는 곳이기에 다른 이민 사회와는 또 다른 자부심이 있다”고 했다.

◇본토 독립운동의 시초, 공립협회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밭에서 한인들의 첫 이민생활이 시작된 즈음을 전후에 본토에도 한국 유학생들과 이민자들의 유입이 시작됐다.

미주 최초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를 창립한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이 유학을 목적으로 샌프란시스코 땅을 밟은 것은 1902년 10월쯤이다.

1903년 한인 노동자 18명이 모여 설립된 공립협회는 친목단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조직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공장이나 농장의 노동자들로 가난했지만 수입의 일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했다.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도 공립협회 소속이었다.

한인단체들의 통합운동이 일어난 것은 스티븐스를 저격한 상항의거가 일어나면서부터다.

이를 통해 공립협회는 1909년 2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통합, 해외 독립운동의 요람인 대한인 국민회가 탄생했다.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등이 주축으로 활동했던 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의 중앙총회와 북미,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만주 등지에 4개 지방총회와 산하 116개 지방회로 조직 개편됐다.

1935년까지 자리를 지키던 국민회관은 베이 브릿지 건설로 철거돼 현재는 자취가 사라진 상태였다.

현재 LA에 있는 대한인국민회 기념관은 1938년 국민회가 LA로 이전해 사용한 건물로써 1970년대 한인 교회에 매각됐다가 2003년 기념관으로 복원됐다.

◇독립운동의 출발, 상항한인감리교회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샌프라시스코에서도 교회가 독립운동과 한인단체의 본부 역할을 했다. 1903년 9월 안창호 선생 등 이민자들은 집에서 예배를 열기 시작, 1906년 11월 18일 상항한인감리교회를 창립했다.

기자는 한인회 임원들과 1930년 6월 교회 창립 이래 처음으로 신축된 포웰 스트리트 선상의 교회 건물을 찾았다.

교통이 복잡한 차이나타운의 한 복판에 있었다. 스티븐슨이 암살되기 전 투숙했고, 한국 국빈들이 방문 시 묵는다는 페어몬트 호텔과도 가까운 거리였다.

이 옛 교회 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중국인들이 절로 사용 중이었다.

박병호 전 한인회장은 “교회가 신도수가 늘어나면서 큰 성전이 필요했기 때문에 2003년 지금의 주다 스트리트 성전으로 이전 신축할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기존 건물이 독립운동과 이민 역사 유적지로 갖는 의미를 강조하면서 매각에 대한 반대여론도 컸다고 했다.

“역사 유적지를 지키지 못한 것은 아쉽죠. 누구 하나라도 건물을 지키자면서 돈을 내놓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민사회의 아버지, 이대위 국민회 총회장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를 꼽으라면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제4대 목사인 이대위(1878-1928) 전 국민회 총회장이다.

1913년 국민회 총회장에 임명된 그는 50세 젊은 나이에 과로로 타계하기 전까지 민족운동에서부터 구석구석 한인사회를 돌보는 일까지 도맡은 인물이다.

한인 최초로 UC버클리에서 학위를 받은 그는 언론인으로서 ‘대도’와 ‘신한민보’를 복간하여 주필로서 글을 통해 계몽운동을 펼쳤다.

“전명운, 장인환 의거 이후 전명운은 곧 석방됐지만 장인환은 사형수들만 가는 감옥에서 25년 징역형을 받았죠. 그를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돈을 모은 장본인이 이대위 총회장입니다.”

이대위는 장인환을 면회할 때마다 감옥에서 받은 학대가 말할 수 없이 비참해 눈물이 난다며 장인한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끈질긴 법정 투쟁 끝에 불구가 될 정도로 감옥에서 몸이 상한 장인환은 1919년 감옥 생활 10년만에 가석방될 수 있었다.

이대위는 타계 후 이 지역 사이프레스 묘지에 묻혔으나 샌프란시스코 후세 한인들이 조직한 천장준비위원회와 국가 보훈처의 노력으로 2005년 10월 이대위의 유해는 대전 국립묘지 독립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천장위에서 일했던 박 전 회장은 “이대위 총회장은 이민사회의 참된 정신적인 지주이자 독립운동가, 성직자,교육가, 언론인이었다”며 “이승만은 외교, 안창호는 교육, 박용만은 군사력을 강조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면 이대위는 현실적으로 미주 한인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해결사였다”고 했다.

이대위는 생전에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했다.

“독립을 위해 우리가 힘을 길러야 하는데 우리들이 철저히 배우고, 자유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힘을 길러야 하며, 단결된 힘으로 때를 기다리자. 그리고 기억하자. 못 잊어 금수강산 다시 찾는다.”

■미주 등 항일독립운동의 전개

1903년 1월 13일
갤릭호에 한인 이민자 102명 호놀룰루항 도착
1903년 11월 10일
최초의 미주 한인교회인 그리스도 연합 감리교회 설립
1905년 4월 5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을 위시로 1903년 9월 22일 결성된 친목회를 항일 독립운동 단체로 재편한 공립협회 탄생.
1905년 11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를 중심으로 상항한인연합감리교회 설립됨.

1908년 3월 23일
장인환, 전명운이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스티븐스를 처단하면서 해외 첫 의열투쟁 불씨를 지핌.
1909년 2월 1일
하와이 합성협회와 샌프란시스코 공립협회가 통합해 미주 한인사회 최초의 통일단체인 국민회가 결성됨.

1909년 10월 25일
장인환, 전명운 의거를 불씨로 안중근 의사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일본의 전 총리이자 제1대 조선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1910년 2월
국민회에 하와이 전흥협회와 대동보국회가 합류하면서 명칭이 대한인 국민회로 바뀌며 조직이 확대 개편됨.

1919년 3월 1일
하와이에서도 3.1운동 기념식 열림
1919년 4월 17일
이승만을 국무총리고 하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됨.
1919년 4월 14~16일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을 중심으로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 개최.
1921년 7월 21일
호놀룰루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동지회가 조직됨. 대한인 국민회와 반목과 협조를 거듭하면서 민족독립운동에 앞장섬.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제의 상해침공 전승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져 의열투쟁을 일으킴.
1940년 5월 9일
같은 해 4월 1일 중경의 김구 등이 설립한 한국 독립당을 후원하기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지부 설립.

194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의 한국 독립기원 시가행진 열림.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으로 조국 광복
샌프란시스코=이성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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