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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부지

[사진=중앙포토]

[사진=중앙포토]

자기 전, 시나 수필 한두 편을 읽고 자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엊그제는 어느 작가가 쓴 ‘아부지, 우리 아부지’란 수필을 읽었다. 두 번 세 번 되풀이하여 읽어보았다. ‘아부지’란 이름이 물안개처럼 밀려와 나를 감싸 안았다.

내가 자란 경상도에서는 아버지 보다 아부지가 더 편하고 정겨운 이름이었다. 그렇지만 편지나 공식적인 글에는 아버지라 부르고 썼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머니를 어무이로 불렀고, 아버지는 아부지로 불렀다. 지금도 ‘아부지’라는 말을 들으면 내 어린 시절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른다.

내 나이 일곱 살 되던 해, 아버지는 먼 나라로 떠나셨다. 일 년 동안 병석에 계셨지만 아픈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 아버지는 30여년을 어업 조합 이사직으로 일을 하셨다. 편안한 성격에 음악을 무척 좋아하셨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동네 사람들로부터 호인이라는 평판을 얻었고 마을 유지로 인정을 받았다.

우리 육 남매를 위한 교육열이 매우 높았다. 아버지는 손수 가훈을 만들어 우리들에게 매일 읽게 하셨다. 1.근면 2.정직 3.인내이다. 후에 아버지가 친히 써 놓은 가훈은 큰오빠 집에 보관됐다.



아버지는 큰오빠를 끔찍이도 사랑했다. 맏아들이라 그랬으리라 믿는다. 큰오빠는 일본 유학시절 기차간에서 학도병으로 끌려가 일본군에 입대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국 친구 몇 명과 짜고 탈출을 시도하여 도망병이 되었다. 한국 사람인 우리가 왜 일본을 위해 싸워야 하느냐는 의도였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거쳐 구사일생으로 대만 군에 재 입대했다. 엄청난 시도였다. 오빠의 자서전에 자세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일본 경찰들이 수시로 잠복근무를 했다. 우리 집 근방을 매일 순찰하였고 아버지 사무실과 작은 오빠 학교까지 찾아와 조사를 했다. 그때마다 사무실과 우리 집은 쑥대밭이 되었다. 어머니는 캄캄한 새벽이면 찬물 한 그릇 떠놓고 큰아들이 아무 일 없이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빌었다.

우리나라 어느 가정이든 큰아들은 그 집의 기둥이고 가문의 이름표였다. 아마 지금도 큰아들의 자리는 그러할 것이다. 아버지는 이 사건을 누구에게 말도 못 하였고 오빠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까 노심초사 하루하루를 보내셨다. 온 식구가 초상집 분위기로 살았다. 그렇게 힘든 시절을 보내던 중, 고대하던 해방이 되었다.

아버지는 매일 점심을 싸가지고 부산 영도 부둣가에 나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소식을 못 들은 날은 두 어깨가 축 처져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는 말을 어머니로부터 들었다. 그러던 중 먼저 돌아온 학병으로부터 편지 한 장을 전해 받았다. 드디어 마지막 배로 온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는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대문을 들어오셨다.

그러나 기쁨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오빠가 돌아온 후 아버지는 일 년도 채 안 되어 뜻밖에 중풍이란 무서운 병에 걸렸다. 옛날에는 고혈압에 특별한 약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몸이 불편하신 것도 몰랐다. 기억조차 없다. 심지어 아버지의 장례식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철없는 시절이었다. 이제야 가슴에 소금을 뿌린 듯 아버지 생각에 전신이 저려온다. 아마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병환이 어린 우리들에게 큰 충격을 주지 않게 하려고 아버지 방 근처엔 얼씬도 못하게 하였고, 병간호에만 전념을 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나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큰오빠가 좋았다. 오빠는 막내 여동생을 무척 사랑해줬다. 다정한 오빠였고 어린 내가 보기에도 멋있는 청년이었다. 오빠는 말수가 적었다. 아버지를 잃은 내가 가엽게 보였는지 특별히 막내 동생인 나를 챙겨주었다. 퇴근하여 집에 오면서 사탕을 사다 주기도 했다.

퇴근 후 내가 안보일 때는 ‘미자 어데 갔노’ 하며 찾으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유년시절은 아버지가 안 계신 것을 원망스럽게 느껴 보지 못했다. 큰 불편 없이 지냈다. 오빠는 아버지 빈자리를 칭찬과 사랑으로 채워 주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언어에 능통하여 원하던 외교관이 되었고, 큰 아들의 자리를 잘 지켰다.

오빠는 명절 때나 아버지 기일 때면 잘 울었다. 특히 술 한 잔 하신 날은 아버지 생각을 많이 했고 나 때문에 아버지가 빨리 세상을 떠나셨다고 자책도 했다. 오빠 집에 가면 아버지가 손수 붓글씨로 쓰신 가훈을 액자에 넣어 응접실의 잘 보이는 곳에 걸어 두었다. 그 글씨를 볼 때마다 우리들은 흐뭇했다. 아버지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의 붓글씨 솜씨도 화제가 되었다.

연암 박지원의 ‘연암억선형(燕巖億先兄)’이라는 시를 최근에 읽었다.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며’라는 시다. ‘형님 수염 누구 닮았었나?/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면 형님 얼굴 쳐다보았지/ 아마 형님이 아버님을 닮았었나 봐요/ 형님 돌아가셔서 형님 그리울 땐 누구 쳐다보지?/ 개울로 가서 두건 벗고 내 얼굴 비춰봐야 하나?’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아버지가 그리울 때 큰오빠를 바라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철없는 시절 아버지를 떠나보낸 후, 그 빈자리를 오빠가 대신해 주었다.

바쁜 삶 속에 아버지란 이름을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내가 읽었던 ‘아부지, 우리 아부지’란 글이 숨어있던 아버지를 불러내 가슴을 출렁이게 했다. 잊었던 연인의 이름같이 큰 소리로 불러보고 싶은 말, ‘아부지’이다. 아, 다가가 포근히 안기고 싶은, 아부지, 우리 아부지.


이미자 / 수필가·문학세계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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