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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 <292>칠레와 페루의 독립

아르헨띠나가 독립을 성취한 후 산 마르띤은 상 페루(현재의 볼리비아)를 해방시키기 위한 군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그의 복안은 다른 데 있었다. 산 마르띤은 진정한 남미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를 평정한 후 스페인 세력의 중심지인 페루를 공략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1817년 칠레 공략 준비를 마친 산 마르띤의 군대는 안데스의 최고봉인 아콩가파 산을 넘으면서 바람과 어름과 화산재와 맞서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칠레 주둔 스페인군의 허를 찔렀고 이에 스페인군은 차카부코 전투에서 거의 전멸되는 타격을 입었다. 칠레의 산티아고 시민들은 산 마르띤을 해방자로 환영하고 칠레 총독을 제의 받은 마르띤은 이를 거절하고 칠레 독립운동의 지도자이자 자신의 어렸을 때부터의 친구인 베르나르도 오이긴스에게 총독 자리를 양보했다. 그는 칠레에 주둔하면서 군대의 증강에 힘썼으며 이듬해 마이포 전투에서 스페인군의 잔존 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칠레의 독립을 공고히 했다.

1821년 칠레에서 페루를 공략할 준비에 여념이 없는 산 마르띤은 자신의 병력을 영국인 코크레인경의 함대에 승선시켜서 칠레의 발파라이소항을 출항하여 페루로 향했다. 페루 리마에 입성한 산 마르띤은 부왕을 설득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납득시켰고 드디어 1821년 페루는 독립을 선언했다. 그렇지만 페루 전역이 통제 하에 든 것은 아니였다. 산 마르띤은 더 이상 혁명을 계속할 여력이 없어 부에노스로 귀환하여 일체의 정치 활동을 피했으나 초창기 공화국정부로부터 정권에 위험이 되는 인물로 집요한 감시를 당하자 프랑스로의 망명을 택했으며 그가 해방시켰던 땅을 다시 밟아보지도 못하고 72세를 일기로 1850년 망명지인 파리에서 불운했던 그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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