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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기역 이야기

‘기억나니?’라고 쓴 글에 ‘기억'을 ‘ㄱ’으로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재치 있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역과 기억이 발음이 비슷한 점에 착안한 것이겠죠. 사실 원래 한글 자모의 기역은 ‘기윽’이라고 쓰고 싶었던 이름입니다. 그런데 ‘윽’이라는 한자가 없었기 때문에 비슷한 발음의 역을 가져다 쓴 것이지요.

기역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는 속담이죠. 이제는 이런 속담을 잘 쓰지도 않지만 이해도 쉽지 않습니다. 일단 문맹이 거의 없기 때문에 기역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기에 이 속담이 정말로 무식한 사람을 비꼬는 말로 쓰였을 겁니다. 다음으로 이제는 낫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아져서 기역을 모르는 게 아니라 낫을 모르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제는 기역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게 아니라 낫을 설명하는 데 시간이 더 듭니다. 기역 놓고 낫을 모르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겁니다. 기역을 봐도 낫과 닮았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속담이 뒤바뀌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속담은 우리말의 보물창고여서 옛 자료가 고스란히 들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속담만 공부해도 옛날로 여행하는 거죠. 속담에는 서당 이야기도 나오고, 포도청 이야기도 나옵니다. 호랑이는 얼마나 자주 나옵니까? 지금은 모두 사라진 풍경이지요. 우린 옛날의 이야기라고 표현할 때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들을 때마다 좀 웃깁니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은 그다지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솔직한 고백일 수도 있겠습니다.

기역에 관한 개화기 가사(歌辭)도 있습니다. 작자가 미상이어서 제목도 첫 구절에서 따온 듯합니다. ‘기역 字를 쓰고 보니(작자 미상·대한매일신보 1909)’라는 시인데 망국의 설움과 독립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나 있는 내용입니다. 잠깐 앞부분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역 字를 쓰고 보니 기억하세 기억하세 국가 수치 기억하세 우리 대한 독립하면 영원만세 무궁토록 강구연월(康衢煙月) 태평가로 자유복락(자유福樂) 누리련만 오늘 수치(羞恥) 생각하면 죽더래도 못 잊겠네.’ 글의 내용이 어떤가요? 뒤에는 해방된 조국에 대한 희망이 나와 있습니다. ‘마 字 하나 쓰고 보니 마굴(魔窟) 중에 빠진 백성 어찌하면 건져 낼꼬 진심갈력(盡心竭力) 일심(一心)으로 우리 동포 침해자를 어서 바삐 몰아내고 열강 국과 동등 되어 육대주에 우리나라 빛내보세.’ 이런 날이 진짜로 올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제게는 ‘기역’하면 생각나는 시가 하나 더 있습니다. 강렬한 시인데, 민중 시인 김남주 시인이 쓴 시입니다. 혁명을 꿈꾸는 시인이어서 그런지 제가 볼 때는 선동적입니다. “낫 놓고 ㄱ(기역)자도 모른다고/ 주인이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바로 그 낫으로…”(김남주 ‘종과 주인’) 정말 강렬하지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당시 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시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래도 지금 시대에는 이런 시가 사람들의 마음에 덜 다가올 겁니다.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처럼 노래로도 만들어진 시를 함께 읽어보면 당시의 분위기를 더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기역은 좀 막혀있는 느낌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받침에 쓰일 때는 소리가 지속하지 않는 폐쇄음이기 때문일 겁니다. 막다, 꺾다, 죽다 등의 느낌이 그렇지요. 부러지거나 끝나는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역을 한글 자모의 첫소리로 만든 것이 재미있습니다. 기역이 한글 자모의 순서 ‘아설순치후’에서 아음(牙音), 즉 어금닛소리이기 때문이기는 하지만, 어쩐지 이런 생각도 듭니다.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다, 모든 것은 끝에서 시작하는 거다.’ 꼭 기억하고 싶습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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