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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네트워크] 팍스 아메리카나의 몰락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첫 정상회담을 갖기 한주 앞인 2017년 6월 브루킹스연구소에서 토머스 라이트 미국유럽센터국장을 만났다. 인터뷰에서 한국을 향한 그의 조언은 "미국 정부 내 전통파와 함께 움직이라"였다. 전통파가 누구인지를 묻자 그는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을 지목했다. 전통파는 미국이 그간 구축한 국제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전통적 우방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동맹파를 뜻한다.

첫 정상회담으로부터 2년여가 지난 지금 한국은 라이트 국장의 조언대로 하려 해도 하기 힘든 상황이 됐다.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종료 결정 등 한국이 미국 내 동맹파를 밀어낸 탓도 있지만 매티스 같은 동맹파가 미국 내에서 보이지 않는다.

매티스는 트럼프 대통령의 동맹 재조정 방침에 반발해 떠났다. 매티스의 자리를 메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무임승차는 없다"며 동맹국들을 향해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라고 압박하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요즘 "각국은 각자의 안보를 위한 책임을 분담해야 한다"고 입에 달고 산다.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지구촌을 이끄는 제국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물리력에 기반한다. 물리력은 인구와 영토가 필수조건이다. 노동력과 토지는 생산력이고, 인구와 생산력은 군사력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선 대국이 다가 아니다. 다른 나라가 동의하거나 따라오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힘이 필수적이다.



2차대전과 냉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자유와 인권, 시장이라는 대의명분을 만들었다. 미국은 인류가 나아갈 길을 밝히는 횃불을 든 나라라고 자부했다.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연설에서 "미국의 새로운 세대에게 횃불이 넘겨졌다"고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단 횃불을 밝히려면 비용이 든다. 미국의 가치에 공감하도록 설득하고 유도하는 비용, 즉 동맹 유지 비용이 기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비웃고 있다. 그가 말하는 '아메리카 퍼스트'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자진 철회다.

트럼프 정부의 출범 이후 여야 정치인, 정부 인사, 한·미 관계 전문가들이 너도나도 워싱턴을 다녀갔다. 그때마다 워싱턴 의회와 전·현직 관료들은 "미국은 대통령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의회와 행정부가 있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립서비스였다.

제국을 포기한 미국은 한국에겐 동북아 질서의 혼란을 뜻한다. 미국을 대신할 제국으론 중국이 최우선 순위이지만 불행히도 중화주의에 고취된 중국의 부상은 이미 주변국에 근심거리가 되고 있다. 제국은 국내외적으로 다양성을 인정하며 통합하는 힘이 필수적인데 중국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화이(華夷)'의 이분법으로 지구촌에 중국식 신질서를 강요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던 일본이 서구우월주의에 대응해 아시아인의 자긍심을 살릴 횃불이 될 수 있었는데 일본이 과거에 내걸었던 내선일체는 일본인, 조선인의 차별 없는 공존공영이 아닌 진짜 제국주의 수탈이었다. 일본은 아직도 이런 과거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시아를 대표하는 제국이 될 수 없다. 트럼프의 등장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는 저물기 시작했는데 미국을 대신해 횃불을 들 나라는 보이지 않는다. 횃불의 시대는 가고 주판알의 시대가 오고 있다.


채병건 / 한국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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