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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로 배우는 마르띤의 스패니시 생활회화<288> 시몬 볼리바르3

에과도르의 과야낄에서 열린 두 영웅은 배석 없이 단독회담을 가졌으며 회담 후 산 마르띤은 볼리바르에게 페루의 해방을 양보하고 남미로 돌아갔다.

산 마르띤이 남미로 돌아간 후에도 회담 내용이 알려지지 않아 많은 추측이 난무했으나 두 영웅의 통치 철학이 충돌을 빚어 끝내 타협을 이끌어내지 못했으리라는 것이 가장 우세하다.

1824년 아야쿠쵸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페루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북부와 갈등을 빚어오던 페루 남부 지역을 하나의 공화국으로 독립시켰으며 이 공화국은 볼리바르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볼리바아로 명명되었다. 에스빠냐 식민군은 결정적인 전투인 아야쿠초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페루와 볼리바아 남미 일대를 모조리 잃었다.

볼리바르와 함께 볼리비아 해방의 주역이 된 영웅은 26세 장군 30세에 총사령관이 된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이 알칼라(Antonio Jose de Sucre y Alcala. 1795-1830) 장군이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수크레는 페루 2대 대통령과 볼리비아 6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로 볼리바르와 절친한 친구이자 부하였다.



수크레는 볼리바르의 명령을 받아 1822년 피친차 전투에서 승리하여 끼또를 해방시켰고 1824년 후닌 전투와 아야쿠초 전투에서 대승함으로써 페루와 볼리바아 해방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러한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전략 전술은 그를 겨우 29세 때 '아야쿠초의 대원수'란 칭호로 불리게 했다. 2번에 걸쳐서 대통령을 지내기는 하였으나 정치는 수크레에게 맞지 않았다. 1830년 역시 정치에 환멸을 느낀 볼리바르가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나라를 떠날 뜻을 품자 수크레 또한 정치를 접고 낙향할 생각이었으나 콜롬비아 남부에서 겨우 35세의 젊은 나이로 암살됐다.

▶문의:(213) 381-0041 www.martinspanishcollege@gmail.com

▶웹사이트:www.martinspanishcollege.com

백지원(언어학자/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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