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어머니의 실천은 자녀들을 남다르게 했다

여자 전사들: 도산 안창호의 부인 안헬렌(하)

수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아니고 어머니가 엄청난 희생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선택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스승이었는데 아버지 안창호를 '좋은 친구이지만 부자로 못 살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두 분이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18세에 아버지와 결혼했고 1902년에 함께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3년 후 오빠 필립이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때 우리 가족은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912년에 필슨 오빠가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했고 나는 1915년 수라는 1917년 그리고 랠프는 1926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아버지가 설립한 흥사단 건물 뒤에서 살았다. 로스앤젤레스에 오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우리 집을 거쳐갔고 엄마는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면 항상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는데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도 그들에게 어떻게든 식사를 제공했다. 밥과 김치는 항상 있었고 우리에게 유대인 상점에서 생선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아버지는 시간이 되면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인자했지만 어머니는 엄격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서로 존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겨우 13년만 함께 사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아주 강한 여성이었다. 집 정원에 많은 야채들을 심어 우리가 먹을 수 있게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근교에서 옥수수와 호박을 심은 조그만 밭을 보았는데 어머니가 집앞 텃밭에서 심었던 것과 흡사했다.

아버지는 조경을 무척 좋아했는데 돌 자갈 그리고 나무들을 조합해 정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장미를 심고 어머니는 그 옆에 옥수수를 심었다. 아버지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면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굶지 않도록 항상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아버지는 항상 자기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이었으며 온갖 집안 일을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생업을 위해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로스앤젤레스 최초의 한인 가정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한국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는 병원에서 일했다. 아주 더럽고 힘들고 고된 노동이었지만 어머니는 견뎠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병원 근무에 별문제는 없었다.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할 때도 백인 가족들은 어머니를 미시즈 안이라고 불렀다. 말도 별로 없고 조그만 체구의 어머니였지만 그녀를 존경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웅대한 목표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그 당시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했던 반면 여자들은 집을 떠나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고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교에 진학할 때 어머니는 말리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국인들을 계몽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 좋은 나라를 건국하는 데 기여한다는 웅대한 목표를 품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감옥 생활은 힘들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 땅에 있다"라고 썼다. 1938년 어머니가 랠프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를 방 문했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창문을 열어달라 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의 땅을 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어머니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여성들이 남자들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적은 자신의 남편을 돕는 것이었고 남편의 소장품을 소중히 간직했다.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와 기타 지역으로 이사 다닐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장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포함해 그 시대 사진신부 등 여성 선구자들은 아주 강했기 때문에 미국까지 올 수 있었다.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로 미국에 온 한국 남성들보다 교육받은 사진신부들이 더 총명했다. 내 세대 한국 여성들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그 유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한인 인구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곳에 모여서 살지 못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미국에 와서 살게 된 것이고 우리의 부모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수전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수전=나 역시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고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 당시 미 해군에 동양인이 입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 미 해군에 자원했을 때 나의 입대는 허락되지 않았다. 미군이 한국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는데 몇 달 후 내가 입대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해군 모병소에 가서 입대 신청을 마치고 나는 미 해군 최초의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이 되었다. 1943년에 내가 한국인으로 한국어를 할 줄 알고 조금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군대에서는 나를 워싱턴 DC에 있는 정보국에 발령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첫딸을 얻었다며 무척 귀여워했고 특별히 보살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상했고 훌륭하게 잘 성장하는 것에 항상 관심을 두었다. 아버지가 1926년에 떠나면서 장남인 오빠 필립에게 "나는 하느님께 죄를 짓는구나. 우리 가족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맡기고 떠난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정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고 각자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한국이 좋은 국가가 되려면 중국 외에는 문호를 닫았던 쇄국정책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철학자 교육자 그리고 혁신주의자였다. 집에서 우리와 게임을 같이 하면서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면 좋은 국가를 얻을 것이고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 온 한인 이민자들과는 달리 초기 한인들은 아무것도 없이 혈혈단신 미국에 건너왔다. 교육도 받지 못했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 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신 스스로를 알고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훌륭한 시민이 되는 법에 대해 글을 많 이 썼다. 그는 "미국에서 산다면 미국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독립은 교육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흥사단을 창립 한 것이다.

흥사단은 아직까지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다. 다른 모든 단체는 없어졌다. 특히 한국에서 흥사단은 매우 활발한 활 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두번째 살았던 집은 현재 남가주대학교(USC)에서 활용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1935년부터 1947년까지 거기에 살았다. 그 집에서 어머니와 우리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석방되어 살아서 돌아오길 학수고대했다. 어머니는 1938년 3월 10일에 형무소 병원에서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3월 8일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보내지는 못했다. 3월 10일에 전화가 걸려왔을 때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어머니는 울 면서 "돌아가셨다"라고 외쳤다.

내 딸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한국학을 전공한 와그너 박사의 강의를 들은 후 와그너 박사에게 "안창호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라고 질 문을 던졌다. 와그너 교수는 "한국 최고의 지도자다. 만약 그가 1945년까지 생존했다면 한국이 분단국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와그너 박사는 내 딸이 안창호의 외손녀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랠프=1963년에 한국에 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어머니와 나를 점심에 초대했다. 박 대통령도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다면 오늘날 한국은 통일국가가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는 북한이 고향인 사촌 누나를 방문했는데 그녀는 김구 선생이 북한에 와서 김일성을 만나 통일 한국에 대해 의논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이 아버지의 옛집을 찾았는데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감정이 복받쳐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한국을 한 달 동안 방문했을 때 어머니의 나이는 85세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무런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다. 무표정에 말도 없었다. 1969년 어머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1973년 안헬렌 여사는 남편 안창호 옆에 묘소가 마련되어 도산 묘지에 묻혔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