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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야구…세계 최고 팀을 양 손에

월드시리즈와 챔스리그 제패
BOS 레드삭스, 리버풀 구단주
가주 출신 사업가 존 헨리

결승전이 끝난 뒤 리버풀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빅 이어를 안고 활짝 웃는 존 헨리 리버풀 구단주. 왼쪽은 29세 연하인 세번째 아내 린다 피주티 헨리. [존 헨리 SNS]

결승전이 끝난 뒤 리버풀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빅 이어를 안고 활짝 웃는 존 헨리 리버풀 구단주. 왼쪽은 29세 연하인 세번째 아내 린다 피주티 헨리. [존 헨리 SNS]

흔한 고정관념이 있다. 구단주라는 명함에 대해서다.

보통은 부자가 떠오른다. 엄청난 재력가가 취미삼아 스포츠 팀을 인수해 자기만족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조금 상위의 이미지를 보탠다면 비즈니스적인 것이다. 구단을 투자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다. 역사적으로 명문 스포츠 구단은 가치가 하락한 예가 드물다. 때문에 장기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투자처 중 하나로 꼽힌다. 이런 이유로 유태인과 러시아의 거대 자본이 유입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구단주의 실력에 따라 팀이 혁신적으로 바뀌는 일도 생긴다. 단순한 투자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경영 참여로 실적을 내는 일이다.



존 헨리(70)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를 인수해 월드시리즈 우승 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잉글랜드의 축구팀 리버풀을 사들였다.

그들은 지난 주말 유러피언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했다. 그러니까 헨리는 축구와 야구에서 세계 최고 팀의 구단주가 된 셈이다.

아버지는 농부였다. 옥수수와 콩 농사를 지었다. 인구 5만도 안되는 일리노이의 퀸시라는 작은 도시에서였다.

몇 년 후 가족들이 이삿짐을 꾸렸다. 행선지는 캘리포니아 빅터빌이었다. 15살 된 아들 존의 천식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고등학교와 빅터 밸리 컬리지를 다녔다. UC 리버사이드에서 철학 공부도 했다. 졸업은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키운 콩과 옥수수를 내다판 게 첫 직업이었다. 그 경험이 바탕이 됐다. 그는 마케팅과 경영 전략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결과, 추세추종전략(trend following)을 기반으로한 투자 기법을 개발했다.

1981년 어바인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냈다. 자기 이름을 딴 존 W. 헨리 & 컴퍼니(약칭 JWH)라는 회사였다.

승승장구하며 막대한 자본을 갖게 된 그는 차츰 스포츠, 특히 메이저리그라는 비즈니스에 눈길을 돌리게 된다.

2002년 보스턴 레드삭스를 인수해 구단주로 부임했다. 80년 넘게 우승과 거리가 먼 팀이었다. 취임식에서 그는 "밤비노의 저주를 깨트리겠다"고 공언했다. 2년 뒤 기적을 실현시켰다.

과정이 혁신적이다. 예일대 출신의 28살짜리를 단장에 임명했다. 유명한 테오 엡스타인이다. 그가 현대 야구의 핵심이 된 세이버메트릭스(첨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야구)를 접목시켰다. 결국 지난해까지 4차례나 우승하는 최강팀이 됐다.

헨리는 다시 축구로 눈을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구단주와 이사들의 반목으로 난장판이 된 잉글랜드의 명문 리버풀이었다. 오랜 기간의 재판을 거쳐 2010년 인수 작업이 마무리됐다.

초반에는 비판을 받았다. 머니볼식 야구단 운영 시스템을 도입했다가 실패한 것이다.

해법은 사람에서 찾았다. 마치 (단장) 엡스타인이라는 천재의 손을 빌어 레드삭스의 저주를 풀었듯이, (2015년) 위르겐 클롭 감독을 데려와 전권을 맡겼다. 그리고 4년 만에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승권ㆍ백종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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