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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특집]차동엽 신부에게 ‘산상수훈 팔복’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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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9/12/23 12:16

  <br>차동엽 신부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풀면서 “이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다. 예수님이 일러주신 가르침, 그 핵심 중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차동엽 신부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풀면서 “이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이다. 예수님이 일러주신 가르침, 그 핵심 중의 핵심이 여기에 담겨 있다”고 말했다.

"팔복은 구체적인 생활 교본,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신약성서에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하나는 ‘주님의 기도(주 기도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산상수훈의 팔복(八福)’이다. 거기에 예수의 메시지, 그 핵심이 담겨 있다. 지난해 11월 인터뷰에서 ‘주님의 기도’에 얽힌 코드를 풀었던 차동엽(51) 신부는 “내년 이맘때 다시 오라. 그때는 산상수훈에 담긴 팔복을 풀자”고 말했다.

‘슬픔 끝의 위로’알면 고통 속에도 희망 생겨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가 온유함

꼬박 1년 만이었다. 지난달 30일 철새 떼가 줄지어 하늘을 날아가던 경기도 김포의 미래사목연구소로 차 신부를 찾아갔다. 그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산상수훈의 팔복인가”라는 물음에 그는 “쇼트컷(지름길)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무엇을 향한 쇼트컷일까. 차 신부는 “현대인의 소망은 하나다. 행복해지는 거다. 그런데 방법을 모른다. 대체 어떡해야 행복해질까. 그 비밀이 팔복에 있다”고 말했다. 팔복의 비밀, 행복의 비밀, 그걸 차 신부에게 물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아무리 읽어도, 읽어도 애매하다.

“예수님은 유대인이었다. 히브리어를 썼다. 더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어 사투리인 아람어를 썼다. 제자에게, 과부에게, 고아에게, 병자에게 예수님은 아람어로 말했다. 그런데 예수님 사후, 성서는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유대 문화와 그리스 문화, 그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다. 이 간격을 회복하지 않으면 ‘팔복’의 정확한 의미를 간파할 수가 없다. 게다가 그리스어 성서는 다시 라틴어로, 다시 독일어로, 다시 영어로, 다시 한국어로 바뀌었다. 그 와중에 또다시 간격이 생겼다.”

- 그 간격을 어떻게 넘으려 하나.

“저는 자연과학도(서울대 공대) 출신이다. 저의 접근법은 연역이 아니라 귀납이다. 2000년 전, 갈릴리 호숫가에서 군중에게 설했던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척하면 삼천리’였다. 그만큼 알아듣기 쉬운 말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영어권 기자가 왔다고 치자. 그 기자는 ‘척하면 삼천리’식의 표현부터 막힐 거다. 왜 삼천리인가. 그건 한국 문화를 알아야 이해되는 표현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에도 그런 코드가 있다. 열쇠는 결국 ‘언어’다. 히브리어에 대한 언어사적인 추적, 그걸 통해 간격을 뛰어넘으려 한다.”

-‘주 기도문’과 ‘산상수훈’은 신약성서의 두 기둥이다. 각각 어떤 의미인가.

“주 기도문은 수직선이다. 나와 하느님의 관계를 말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영성 교본’이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수평선이다. 우리에게 수평적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한 마디로 ‘실존 교본이자 생활 교본’이다.”

- 이 ‘생활 교본’의 종점은 어디인가.

“행복이다. 팔복은 모두 ‘행복하여라, ~한 사람들!’로 시작한다. 현대인은 다들 고민한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예수님께선 거기에 대한 답을 던지셨다. 삶의 목표를 ‘행복’으로 정한 거다. 그리고 행복에 이르는 8가지 길을 제시한 거다.”

- 그 길이 추상적이지 않나.

“아니다. 팔복은 관념적인 길이 아니다. 매우 구체적인 길이다. 그래서 ‘팔복’은 아름다운 시(詩)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강령이다. 굳이 시라고 하자면 현자(賢者)의 시에 해당한다. 우리가 인생에서 헛다리 짚지 않게, 시간을 허송하지 않게, 거짓에 속지 않게 도와준다. 그래서 팔복이 행복으로 가는지름길이 된다.”

1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행복하여라. 어떤 행복인가.

“‘행복(Happiness)’의 어원은 ‘Happen(일어나다·발생하다)’이다. 행복은 발생하는 것이다.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 누가 발생시키느냐. 바로 나 자신이다. 이건 행복에 대한 원리이자 법칙이다. 테크닉이 아니다. 예수님께선 그렇게 행복을 발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마음을 알려주신 거다.”

- 대체 ‘마음이 가난한’게 뭔가.

“먼저 예수님께서 사용했던 히브리어를 보자. ‘가난’은 ‘에비온(ebiyon)’이다. 이 말은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가난’을 뜻한다. 성서에선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에게 이 말이 종종 쓰였다. 요즘 말로 하면 갈 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노숙자쯤 된다. 그런 절대적 가난을 가리킨다.”

- 그럼 ‘물질적 가난’을 뜻하나.

“아니다. 그렇게 의미가 얕지 않다. 이건 ‘영성적인 가난’을 뜻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도 ‘마인드(Mind)’가 아니라 ‘영(Spirit)’이란 의미다. 구약 시편의 영성가들은 ‘저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하느님, 저를 돌봐주세요. 주님의 도움 없이 저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영적인 가난은 그런 가난이다.”

-‘영적인 가난’을 한마디로 해달라.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에 맡기면서 살려는 자세다. 내가 인공적으로 나의 안전을 구하지 않고, 하늘과 자연에 맡기고 의지하면서 살려는 태도다.”

-‘영적인 가난’이 왜 중요한가.

“사람들은 다들 ‘내 삶의 안전장치’를 마련한다. 돈을 통해, 직장을 통해, 가족을 통해, 명예를 통해 그걸 구축한다. 그리고 안전장치가 버텨주길 바란다. 그런데 이런 장치는 결국 무너지게 마련이다. 궁극적 안전장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적인 가난’의 바탕에는 무너지지 않는 안전장치가 있다.”

- 구체적인 일상에선 어떻게 써먹나.

“이 세상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누리려고 하는 거다. 내게 주어진, 이미 주어진 이 하늘의 은혜, 자연의 은혜를 누리는 거다. 그게 영적으로 가난한 거다.”

- 그래서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나.

“그렇다. 우물 안 개구리와 우물 밖 개구리가 있다. 그들이 보는 하늘은 다르다. 우물 안 개구리는 집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보고 행복해하려고 한다. 그런데 우물 밖 개구리는 하늘에 달린 별을 보고 행복해한다. 우물 밖 하늘을 보면 다시 우물 속으로 들어가도 개구리의 삶은 달라진다. 여유 있고, 지혜롭고, 넉넉하고, 자∼알 살 수 있게 된다. 하늘나라가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2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 슬퍼하는 사람들. 어떤 슬픔인가.

“마태오 복음에선 ‘펜툰테스(Penthoun-tes)’라고 썼다. 이건 상실의 슬픔이다. 사별 등 매우 소중한 걸 잃은 극심한 슬픔을 뜻한다. 루카 복음에선 ‘클라이온테스(Klaiontes)’란 말을 썼다. 그건 땅을 치면서 우는 걸 뜻한다.”

- 예수는 무슨 단어를 썼나.

“히브리어로는 ‘사파드(Sapad)’다. 애통해하면서 우는 걸 뜻한다. 예수님은 이 말을 썼을 것이다. 슬픔은 감정이고, 우는 건 표출이다. 사파드에는 이 두 의미가 통합돼 있다.”

- 이상하다.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한가.

“맞다. 사람들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도대체 슬퍼하는 사람이 왜 행복할까. 그 답이 ‘위로’에 있다. 유대인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성서를 기록할 때 수동태를 많이 썼다. ‘하느님’이란 주어를 생략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 구절의 ‘위로’는 ‘하느님이 주시는 위로’가 된다.”

- 슬프다고 다 위로를 받는 건 아니지 않나.

“이런 말이 있다. ‘슬픔은 비와 같다. 장미꽃을 피울 수도 있고, 진흙탕을 만들 수도 있다.’ 결국 슬픔도 선택의 문제다. 헤리 로더라는 가수가 있었다. 그는 공연 중에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노래하며 공연을 마쳤다. 그리고 야전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들고 우는 대신, 그곳에 있던 군인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훗날 잡지사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의 죽음이 너무도 슬펐다. 그러나 하느님께 제 슬픔을 맡겼다. 그러자 놀라운 위로와 힘을 받았다. 나는 그걸 보여줬을 뿐이다.”

- 우리의 일상에 극심한 슬픔이 닥칠 때는 어찌해야 하나.

“슬픔과 절망을 겪지 않은 사람의 삶은 싱겁다. 그래서 누리는 행복도 싱겁다. 우리가 명심할 건 슬픔의 끝에 위로가 있다는 거다.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위로가 말이다. 그걸 가슴 깊이 받아들이면 희망이 생겨난다. 고통이 와도, 슬픔이 와도 두렵지만은 않게 된다. 그 고통의 끝에 무엇이 있는 줄 아니까.”

3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의 히브리어는?

“‘아나브(Anab)’다. 온유함, 겸손함의 뜻을 담고 있다.”

- ‘온유함’의 정확한 의미가 뭔가.

“온유한가, 아닌가. 그건 식당에 가보면 안다. ‘뭘 드실래요?’할 때 ‘아무거나’하는 건 우유부단한 거다. 온유한 사람은 ‘오늘은 네가 시키는 걸 먹어볼게’라고 한다. 나의 자유의지를 양보하고 상대방의 뜻을 존중하는 거다. 가장 성숙한 사랑이 뭔가. 그건 상대방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거다.”

- 종교적으로 볼 때는 어떤가.

“어마어마한 뜻이 된다. 여덟 가지 복 중 하나를 고르라면 저는 ‘온유’를 고르겠다. 거기에는 ‘내 뜻대로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소서’하는 고백(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올렸던 기도)이 녹아있다. 항상 내 뜻은 생각이 짧다. 그러나 당신 뜻이 이뤄지면 다르다. 거기에는 큰 지혜와 큰 능력이 흐른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에게 무한 지혜와 무한 능력이 흘러 드는 거다. ”

- 생활 속의 예를 들어달라.

“인생을 바둑이라고 치자. 우리의 바둑은 18급이다. 하느님의 바둑은 100단이다. 18급은 100단의 훈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열고 100단의 훈수를 따른다. 그러나 고집이 센 사람은 어떤 훈수가 와도 자기 바둑을 고집한다. 그는 결국 18급 바둑, 18급 인생에 머물게 된다.”

4.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의로움. 무슨 뜻인가.

“히브리어로는 ‘체다카(Tzedakah)’다. ‘어떤 기준에 부합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모호하다. 기독교에서 그 기준은 뭔가.

“시대마다 달랐다. 아브라함에겐 ‘네 양심에 충실했느냐’였다. 모세 때는 ‘십계명’이었다. 십계명을 잘 지켰는지가 의로운가, 아닌가의 기준이었다. 십계명의 알맹이는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다. 나중에는 그게 쏙 빠져버렸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선 십계명의 껍데기로만 기준을 재는 율법주의가 판을 쳤다. 그걸 예수님께서 뒤집었다.”

-어떻게 뒤집었나.

“‘사랑’으로 뒤집었다. 그건 격식을 파괴하는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의로움의 잣대로 ‘사랑’을 명시했다.”

-사랑이 깔린 의로움. 그럼 뭐가 달라지나.

“격이 달라진다. 격이 낮은 의로움은 날카롭고 차갑다. 그건 상대방을 비판하고 단죄한다. 그러나 격이 높은 의로움은 부드럽고 따뜻하다. 상대방을 안아서 녹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허공에다 정의를 외치고, 후자는 눈물로 사랑을 산다.”

-오늘날 얘기로 풀어달라.

“안중근 의사를 보라. 그는 독립운동 근거지가 탄로날 우려가 있음에도 일본군 포로를 풀어준 적이 있다. 그리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고 말했다. 그에겐 하나의 생명도 아끼는 사랑의 마음이 있었던 거다. 안 의사는 그 마음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다.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사랑의 주춧돌 위에 선 정의, 그게 진정한 의로움이다.”

-거창하다. 의로움은 투사의 덕목인가.

“아니다. 의로움(정의)은 투사에게만 요구되는 덕목이 아니다. 이름 없는 소시민도 삶의 뒤안길에서 주워 올릴 수 있는 참 행복의 비밀이기도 하다.”


2000년 전 이스라엘 갈릴리의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는 산상수훈을 설했다. 그림은 원로화가인 김정자 마리스텔라의 ‘산상수훈’. [김정자 마리스텔라 제공]


5.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자비’가 뭔가.

“히브리어로 ‘케세드(Chesed)’다. 이건 굉장히 풍요롭고 심오한 단어다. ‘케세드’는 동정이나 측은지심 등 공감 능력을 뜻한다.”

-쉽게 설명해 달라.

“암 선고를 받은 할아버지가 있었다. 갈수록 성격이 난폭해졌다. 가족은 물론 병원의 전문 상담가도 소용이 없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를 아는 동네 꼬마가 병문안을 왔다. 병실에 들어간 꼬마는 30분 뒤에 나왔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랬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할아버지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들과 편안하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가족이 꼬마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니?’ 꼬마가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아버지께서 우시기에 따라서 같이 울었을 뿐이에요.’ 그게 바로 아이가 건넨 자비였다.”

- 그게 왜 자비가 되나.

“상대방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됐으니까. 그렇게 상대와 내가 통했으니까. 예수님이 일생을 통해서 구원 활동을 했던 동기가 뭐겠는가. 바로 자비심 때문이다.”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왜 자비를 입게 되나.

“자비는 남는 장사다. 우리가 자비를 베풀면 하늘에서 더 큰 자비가 쏟아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자비는 선한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자비가 영적으로 발휘되면 죄에 대한 용서가 되고, 물질적으로 발휘되면 자선이 된다.”

-생활 속에선 어떻게 적용하나.

“‘남을 심판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딱 이 세 마디를 실행하는 거다. 어려운가? 그렇지 않다. 오스트리아에서 공부할 때 학장 신부님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학교에 몸담고 있어 자선을 베풀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운전을 할 때라도 자선을 하자는 생각으로 계속 양보 운전을 한다.’ 생활 속 자선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6.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그 말이 그 말 같다. 깨끗함이 뭔가.

“그리스어로는 ‘카타로스(Katharos)’다. 잡티가 없는 순수함을 뜻한다. 그런데 이 말은 ‘카타르시스(katharsis)’의 어원과 같다.”

-어원이 같다는 건.

“카타르시스는 씻겨냄 뒤에 오는 거다. ‘카타로스’도 마찬가지다. 눈물로 씻어내고, 회개로 씻어내는 거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보며 씻어낸다. 예수의 삶을 묵상하며 자신을 씻는다. 그렇게 씻어낸 뒤에야 마음이 깨끗해지는 거다.”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현대인은 정신 없이 바쁘다. ‘씻어냄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다.

“이탈리아의 영성가 카를로 카레토가 이 물음에 답을 던진 바 있다. ‘당신이 만약 사막에 갈 수 없다면 당신의 생활 가운데 사막을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침묵과 기도를 하라. 그렇게 영혼을 재건하기 위한 고독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영성 생활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고 했다. 정말 보는 건가.

“그건 3차원적인 언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는 꿈에서 하느님을 봤다’‘환시를 통해 하느님을 봤다.’ 그런데 그건 하느님을 만나는 가장 낮은 수준이고, 가장 위험한 수준이다. 형상이 없는 하느님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통함’의 의미가 된다.”

-통한다는 게 뭔가.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서로에게 거할 때 통하는 거다. 그때 안테나의 주파수가 맞는 거다. 마음이 깨끗할수록 안테나의 감도도 좋아진다. 그래서 나의 마음이 잡음 없이 하느님의 마음을 수신하는 거다. 그게 통함이다.”

7.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평화가 뭔가.

“그리스어로 ‘에이레네(Eirene)’,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다. 죄나 허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를 가리킨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나는 요즘 평화롭다고, 문제가 없다고.

“그건 주로 세상이 주는 평화다.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박해가 없을 때, 냉장고가 가득 찼을 때, 생활에 골칫거리가 없을 때 평화롭다고 느낀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화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박해를 받을 때도 평화롭고, 냉장고가 비었을 때도 평화롭고, 생활에 문제가 있을 때도 평화롭다. 예수님은 그런 평화를 말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때 쓰인 ‘안식’이 그리스어로 ‘에이레네(평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전쟁터에서, 역경의 한복판에서도 누리는 평화다.”

-어떡해야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나.

“먼저 나 자신과 화해해야 한다. 내 안의 상처, 내 안의 허물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말하는 거다. ‘사랑해! 그래도 괜찮아.’ 그렇게 수용하고 사랑하면 화해가 이뤄진다. 그 다음에는 사람과, 또 자연과 평화를 이루는 거다.”

8.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많은 사람이 여기서 ‘순교’를 떠올리지 싶다.

“이 구절은 팔복의 절정에 해당한다. 여기서 핵심은 순교가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는 사람은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을 수가 없다.”

-박해를 받는데 왜 행복한가.

“그건 역설적인 행복의 비밀이다. 박해 받음의 상징은 십자가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은 ‘돌팔이 메시아’라고 했고, 그리스인은 ‘어리석다’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은 십자가에서 약함이 아니라 강함을 봤다. 죽음이 아니라 부활을 봤다. ”

- 그건 대체 어떤 힘인가.

“몰아(沒我)적인 사랑에서 뿜어져 나온, 죽음도 이기는 힘이다. 결국 시련과 고통, 박해를 이기는 건 사랑의 힘이다.”

-하늘나라가 왜 그들의 것이 되나.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다. 그 중에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은 완성된 후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랑은 다르다. 완성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된다. 결국 셋 중 사랑만 남는다. 사랑은 하늘나라의 속성이다.”

인터뷰 말미에 차 신부는 성서 속 일화를 하나 꺼냈다. “아버지가 두 아들에게 ‘가서 추수를 하라’고 말했다. 한 아들은 ‘네!’ 대답만 하고 추수를 하지 않았다. 다른 아들은 대답 없이 가서 추수를 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다. ‘이 둘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행했느냐?’”

예수의 물음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했다. “‘너, 나를 믿느냐? 너, 나를 따르느냐?’ 우리는 이 물음에 ‘아멘!’하고 입술로만 대답한다. 그래서 ‘이름만 그리스도인,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고 만다. 예수님께서 기다리시는 건 입술을 통한 대답이 아니라 삶을 통한 대답이다. 그 구체적인 대답의 지침서가 바로 산상수훈의 팔복이다.”

◆차동엽(51) 신부=서울 관악산의 달동네 난곡에서 자랐다. 연탄과 쌀 배달을 하며 유년을 보냈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가톨릭대에 들어가 1991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성서신학으로 석사, 사목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인천가톨릭대 교수, 미래사목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저서 『무지개 원리』는 100만 부 이상 팔렸다. 11월 중순에 산상수훈 팔복을 풀이한 저서 『행복선언』을 출간할 예정이다.

(중앙일보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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