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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칼럼]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정란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혹 떼려다 혹 붙여 온 꼴이 된 건 아닐까?

점 빼는 laser 시술을 하고 온 지 한 달이 지났다. 사람에 따라 회복되는 시간이 다를 수 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긴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행여 관리를 소홀히 하여 덧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어 세안과 기초화장에 신경 쓰면서 정성스레 관리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금은 나아진 모습을 기대하며 거울 앞에 섰다. 그런 내 마음을 비웃듯 점을 뺀 흔적들이 옅어지기는커녕 더 짙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점을 빼도 쉽고 빠르게 회복되는 것 같던데 왜 나만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생각하니 공연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깨를 뿌려 놓은 듯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전래동화 ‘혹부리 영감’이 떠올랐다.

동병상련 인지 혹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여야만 했던 혹부리 영감의 억울함이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자기처럼 힘들게 달고 다녔던 혹을 뗐다는 건넛마을 영감의 말을 듣고 한밤중에 깊은 산속으로 도깨비를 만나러 갔다. 부푼 마음으로 무서움도 참아가며 마침내 만났는데 되려 혹 하나를 더 붙였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기가 막혔을까? 그것보다 더 억울한 건 단지 그가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모두가 그가 덧붙여 온 혹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음 착한 혹부리 영감은 얼떨결에 갔다가 행운을 얻었지만, 그 영감은 혹을 떼려는 노력으로 힘들게 찾아간 곳이 아니었던가? 나 역시 당연하다고 여겼던 편견이 갑자기 안쓰러운 모드로 바뀌게 되었다.



늙는다는 것과 죽음은 나와 무관하거나 아주 먼 훗날의 일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몇 해 전부터 몸이 삐걱거리기 시작해도 무리해서 그런 거로 생각했을 뿐 나이 탓이라 생각지 않았다. 텍사스의 강한 태양 아래서도 나름대로 깨끗함과 탄력을 유지하며 잘 견뎌 주었던 얼굴에 지천명이 지나자 기다렸다는 듯 점이 하나둘 생기기 시작했다. 찬찬히 살펴보니 점뿐만이 아니라 얼굴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나이 들어서 점이 생기기 시작하면 하루가 다르게 빨리 늘어날 수도 있고, 점을 빼고 나면 젊어 보인다는 말에 혹해 한국 방문 때 점을 빼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많아도 열 개 정도겠지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술 의자에 누웠는데 내 예상과 달랐다. 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야말로 깨를 갈아서 쏟아부어 놓은 것처럼 점이 많다고 했다. 그 많은 점이 얼굴을 덮기 전에 발견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마취 크림을 발랐다. 시술을 시작했는데 마취약 때문인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충분히 견딜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따닥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살 타는 냄새가 진동하더니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마취하지 않은 점들까지 빼 주려는 의사의 친절함 덕분에 고통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만두고 싶었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꽉 잡고 있던 손이 화석처럼 굳어질 즈음에 사백만 년처럼 느껴졌던 사십 분간의 시술이 끝났다. 반쯤 넋이 나간 상태가 되어버린 내게 간호사가 시술 후 관리법을 설명해 주었다. 열흘간 처방해 주는 연고를 바르며 물 세안만 하고 화장품이나 비누는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 나흘 뒤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알토란 같은 날들을 퉁퉁 부은 얼굴로 연고만 바르고 지내야 하다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처방전이었다. 그렇다고 남은 날들을 포기할 수 없는 법! 벌겋게 얼룩지고 퉁퉁 부은 얼굴로 하루를 일 년 같이 계획했던 스케줄대로 알차게 보냈다.

간밤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요란한 비가 내리더니 갠 하늘이 시리도록 푸르고 티 없이 맑아 보였다. 천둥 번개 못지않은 고통이 지나간 내 얼굴도 하늘처럼 맑아졌으면 좋겠다고 은근슬쩍 욕심을 내다가 문득 “아이고! 멀쩡한 얼굴을 돈 들어 저 꼬라지로 만들어 놓고, 쯧쯧 철이 없는 건지, 나이 들면 점도 나고 주름도 생기는 기 당연하지, 괜스레 욕심부려 저 고생을 하네. 쯧쯧! 저 얼굴을 우짜노?”라고 지청구를 하시던 친정엄마가 음성이 떠올랐다. 엄마 말처럼 내 욕심이 지나쳤던 걸까?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 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터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 백발가, 우탁禹倬-
 
고려 시대 문인이자 학자이며 기개와 절조, 학문과 실행을 겸비한 ‘우탁’도 그의 시조를 통해 자연적으로 찾아오는 늙음을 인위적으로 막아 보려는 행동들이 욕심이 아니라 인간의 솔직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늙음을 막는 방법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지금도 꾸준히 연구하고 있다. 중학교 시절 처음 이 시조를 접했을 때는 자신에게 오는 늙는 길과 백발을 가시와 막대기로 막으려는 노인이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귀엽게 느껴졌지만, 간절한 마음은 상상하지 못했다.

어느덧 내게 다가온 늙음을 laser 시술이라는 의술로 막으려는 나이가 되고 보니 칠백여 년 전 (1263~1342) 사람의 마음이 충분히 공감되었다. 아울러 점을 빼려는 시술이 욕심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이 사십이 넘으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에이브러햄 링컨은 말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내면도 중요 하다는 뜻이다. 사람의 모든 감정과 생각, 행동방식, 마음 씀씀이 등이 나이테가 되어 각자 얼굴에 드러나 모양을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햇살이 한층 투명해지면서 불어오는 바람에 서늘함이 묻었다. 가을이다. 좋아하는 시집을 꺼내 볕이 좋은 patio로 나갔다. 가장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서 시와 가을을 즐겼다. 좋은 시는 복잡했던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고 자신을 성찰하게 한다.

상처가 아물면 점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겉모습이 깨끗해졌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 이참에 나도 모르는 사이 뿌리내린 욕심, 편견, 아집, 고정관념이란 마음속 점들도 빼내야겠다. 독서만큼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명약은 없는 듯하다. 최근에 들었던 뉴스 때문인지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란 노래가 아프게 다가온다.

의미는 다르지만, 버려야 할 것들이 내 인생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가기를 가을 아침에 소망해본다.

정란숙
2017년 텍사스 중앙일보 한인 예술대전
문학부문 우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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