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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현 문학칼럼: 혼자 점검하는 2019년

고마워 제이J, 고마워 디D.

우리 동네 가을 풍경. 2019. 10. 미국 워싱턴 주

우리 동네 가을 풍경. 2019. 10. 미국 워싱턴 주

집 앞 가을 풍경. 2019. 10. 워싱턴 주

집 앞 가을 풍경. 2019. 10. 워싱턴 주

결국 이 인생을 살아가는 주인은 나이기에, 내 한해를 스스로 돌아보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꼽도 빼고, 세수도 하고 단장을 하며 나를 돌아보듯이 지난 열 두달을 되돌아 보기로 한다.
아아... 그놈의 자리가 뭐라고......

사실 '자리' 혹은 '일'은 그냥 그 자리에서 노동을 행사함으로 인해, 일정 금액이 나오는 것이다. 또 그 자리에 함께 하는 동료들과의 호응, 대화, 상호 작용을 통해 내가 성장하기도 하고 반대로 상처받기도 한다. 따라서 일에 목숨 걸 필요도 없고, 영혼을 팔 이유는 더더욱 없다. 그런데도 종종 나는 (혹은 우리는) 일에 너무 많이 빠지게 되고, 매몰되고, 워크홀릭Work Holic 일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일 혹은 그 자리가 마치 나를 전부 대변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나보다. 그 오류에 빠지지 않기위해서라도 취미가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하다.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여유를 갖는 일. 소위 말하는 워라밸 -일과 휴식의 균형을 찾는 일이 어쩌면 일보다 더 중하다. 미국 살이 6년째. 서점 캐셔, 시험 감독원, 공립학교 대체 교사를 거쳐 연방 공무원 일년의 삶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딱 일년 전
꼬박 일 년이 넘었다. 이 미국 연방 공무원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훈련을 받고, 일터 사람들과의 대화, 관계에 적응한지 말이다. 이민 온 지 육년에 말단이지만 이 세계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사함을 갖는다. 그만큼 대륙을 건너는 일은 다리를 후덜덜 거리게 할 만큼 안정감을 갈구하게 하는 일이었다.
고백하건데, 지금 하는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한국에서 이 년 정도 일했던 중견 기업에서의 일에 비하면 아주 적다. 그때는 무엇이 그렇게 나를 못견디게 만들었을까. 사실 나는 늦은 나이에 회사에 정규직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던 행운아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알 수 없는 갑갑함이 나를 짖누르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군대와 흡사한 문화 때문이었나? 지금 미국서 하는 일도, 그때 했던 일도 내 전공과는 크게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감이 안잡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책상 자리를 지켜야 했던 갑갑함이 나를 힘들게 하지 않았나 싶다.



CYA Cover Your Ass 나 자신을 지키는 법.
내 자리 보전을 위해 타인으로부터 가해오는 공격에 잘 대처하는 것.
동료와 대화를 하다가 이런 단어를 배웠다. CYA. 그렇다. 나는 일에서 정말로 많은 구어체적 영어를 배운다. 한국어로 직역을 하자면 '엉덩이를 가리다/보호하다' 정도가 될까. 내 식으로 해석을 하자면 나를 스스로 지키는 것이다. 일터에서 훈련을 끝내고 막상 현장에서 사람들과 일할 때 지난 10개월동안 배운 것은 이 기술이다. 의도치 않게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내 자신을 처신해야 하는지. 피하는 것이 답일 때도 있고, 직면하는 것이 답인 때도 있다. 다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이처럼 감정적으로 험악할 수 있는 환경에서도 좋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는 동료 디D로 부터 이런 말도 들었다. 난 내 스스로를 약간 비하하면서
I am not a good driver. 난 좀 좋은 운전자가 아닌것 같아.
이랬더니,
Don't say that. If you keep saying you are a bad driver, you really will be a bad driver. Instead, say to yourself that you are a good driver.
그렇게 말하지말어. 너가 스스로에게 자꾸 나는 나쁜 운전자다. 이렇게 말하면 진짜로 그렇게 돼버려. 그러는 대신 "나는 좋은 운전자다!"라고 말하면 진짜로 그렇게 될거야.
나는 이 작은 대화에서 그녀에게 큰 고마움을 느낀다. 이럴 때 한자 사람인 모양이 떠오른다. 혼자서 있을 때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기대면서 성장하는 것. 그것이 인간인가. 인간의 사회성. 한국에서 친구도 많았던 내가 미국에서는 일에서 만나는 미국인이 사회 생활의 전부다. 일터가 곧 나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 환경에서 이같이 내 영혼에 거름이 되어 주는 말을 들으면 참 깊은 악수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다.

진짜 성장
또 다른 동료 제이J도 있다. 며칠 전 일 년간의 업무 평가를 마치고 상사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일단은 전부 다 프린트해서 받아왔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 역시 지난 한 해 동안 큰 실수없이 나름대로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의 결과는 아니었다. 뭔가 모르게 억울한 마음도 들었고 울적했다.
-혹시 내가 아시안이라 마이너리티라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닐까. 내가 정치를 못하긴 했지. Kissing the Ass. 상사 엉덩이에 뽀뽀를 하면서 정치를 했었어야 하는데, 아...... 그게 내가 아닌걸 어떡하라고...... 그래. 나랑 A랑 뭐가 그렇게 다르다고 A는 만점을 받고 나는 고작 이것밖에 못받은거야! 이건 정말 나를 차별하는 거라고!!!!!
속으론 이런 생각들로 가득찼지만, 막상 상사 앞에선 큰 말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상사는 책상에서 같이 앉아 "너가 지난 일년동안 일한 걸 쭉 지켜봤는데, 이런건 잘한것 같고, 이런건 못한것 같아." 와 같은 상세한 설명, 대화도 없었다. 일단은 내가 쭈욱 서류를 다 읽었다. 그래도 나는 상사 입으로 나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싶었다. 구체적인 나의 업무에 대한 말은 없었다. 다만 '너가 혼자 서류를 읽는 걸 원했는지, 아니면 같이 하나 하나 보기를 원했는지 몰라서 난 가만히 있었어.' 와 같은 체면 치레적인 말뿐이었다. "내가 어떻게하면 더 일에서 성장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도 뭔가 뜬구름 잡는 말만했다. 교과서와 같은 큰 도움이 안되는 말만 나열하였다. 아, 그래. 난 그냥 상사 복이 없다. 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인채 밖으로 나왔다.
그때, 제이를 만났다. 제이는 이 일터에서 꽤나 오랫동안 일했고 나는 그의 교수님같은 장광설이 좋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그의 잘 짜여진 논리가 좋았다. 그래서 큰 부담감 없이, 터억, 하니 내 업무 평가 서류를 보여줬다. 허허허. 이것밖에 못받았다네 이 사람아. 하는 표정으로 건넸다. 제이는 나름 꼼꼼하게 읽으면서, 이런 부분은 잘 한것 같네. 라고 다독여줬다. 그리고 그는 진심을 다해 내게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이봐, 사실 업무 평가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상사의 성향이 크게 작용할 수 밖에 없어. 십년도 넘게 여기서 일 한 나는 이제 나만의 기준이 있어. 기준에 도달했음. 이 점수만 넘으면 나는 만사 오케이야. 왜냐면 상사의 성향에 따라 오락 가락 하는게 이 업무 평가야. 어떤 해에는 상사가 나를 최고 점수로 주고 싶어서 상사 윗사람들에게 나를 엄청 어필하기도 했어. 그런데 또 다른 해에는 내게 내가 생각해도 형편없어 보이는 점수를 주기도 했단 말이야. 그만큼 어떤 상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왔다 갔다 하는 점수에 너무 동요되지 말어. 그리고 정말로 너 자신에게 물어봐. 너가 여기에 왜 있는지.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래. 일터에 제때에 출근해서 제 시각에 퇴근하는거. 그런데 출퇴근 도장 찍는거 말고, 정말로 너가 여기에 왜 있는지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일하면서 지켜본 건, 너가 영어가 제2외국어라서 스스로 위축되어 있는것 같은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어. 너의 영어는 그정도로 충분해. 한국인만 아니라 대부분의 아시안 국가 사람들에게 영어는 어려워. 특히나 idiom이 어렵지. 하지만 너는 잘 하고 있어. 대신 말을 할때, 빨리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하려고 해봐. 그리고 일부러 크게 말할 필요도 없어. 대중에게 말을 한다는 것이 허공에 크게 소리치는 건 오히려 공해를 만들 뿐이야. 아무도 듣지 않는다고. 대신 너의 목표 청중을 정해서 그 사람에게 명확하게 내 메세지를 전달한다고 생각해봐. (마치 화살을 던지듯이! - 내가 추렴구처럼 말을 했다) 그래! 좋은 표현이야. 화살을 던지듯이 과녁을 향해 말을 하면 크게 말할 필요도 없어."

사실 난 그의 이런 말들을 듣고 눈물이 날 뻔했다. 그리고 혼자 있을때 찔끔 찔끔 이 생각을 하면서 감사와 감동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아, 이렇게 나는 참으로 복이 많다. 주변에 그것도 일주일에 40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나다니 말이다. 제이는 위에서 말한것 말고도 그의 관찰에 기반한 이런 저런 나에 대한 피드백을 주었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내가 일터에서 정말로 성장하는 게 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무조건 승진 혹은 무조건 최고점을 외치는게 답이 아니었다. 제이와의 대화 후, 나는 조금 더 일터에서 적극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중이다.
집 앞 가을 풍경. 2019. 10. 워싱턴 주

그리고 즐기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에 대한 내 올해의 스스로 피드백은 즐기자이다. 브런치 웹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고동운 작가님과의 짧은 글대화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 주 공무원으로 30년 일하신 이 분은 내게 한 마디 해 주셨다. 시간이 생각보다 빨리가니 그 시간들을 즐기시라. 는 말. 그렇다. 인생, 끝까지 높은 속도로 달린다가 답이 아니다. 달리면서 혹은 걷거나 주저 앉거나 다시 일어서거나 기거나 다시 앉거나 눕거나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와 웃음, 그리고 가끔 들여다보는 통장. 이런것이 내 삶을 풍요롭게 함을 잊지 말자. 그래도 수고했어. 2019년. 남은 두 달의 인생도 꼭꼭 천천히 씹어 소화하듯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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