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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빨간 책’의 유혹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6/07/25 07:04

이소영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선생님 눈을 피해 몰래 소설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행여 들킬세라 책 뒤에 참고서를 덧씌우는 방법으로 위장했었다. 그 당시 내 감성을 일깨우고 미지의 세계를 알려준 책들은 ‘즐거운 사라’,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이른바 불온서적(?)이었다. 알만한 사람은 ‘아하’하는 감탄사와 함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을 소설이다. 학생이 읽으면 안 되는 책이라고 꽁꽁 봉인할수록 더 악착같이 찾아 읽게 되는 이유가 뭘까?

SBS 라디오 피디이자 화제의 팟캐스트 ‘씨네타운 나인틴’의 세 진행자가 쓴 ‘빨간 책’(사진)에는 내가 10대에 탐독했던 책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부터 이원복 ‘먼 나라 이웃 나라’, 진순신 ‘중국의 역사’, 그리고 우노 고이이치로 ‘황홀한 사춘기’까지. 어른들이 권하지 않았지만 몰래 읽은 책에서부터 어른들이 권했지만 마음대로 읽은 책들에 대한 작가의 독서일기 형식이다. 이들에게 책은 삐딱한 친구이기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대신 해준 친구이기도 했다.

‘빨간 책’ 딱지를 붙인 31권의 책을 하나씩 살펴보면 하나같이 명작들이다. 사춘기 소년이 어른이 될 때까지 그동안 불온서적으로 분류됐다는 것이 의아하다. 시대에 따라 정치, 종교적인 논리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뽀로로 인기 못지않은 국민 만화 ‘아기공룡 둘리’가 80년대 후반, 연재될 당시에는 저질 불량만화로 지정됐다는 사실이 믿어지는가. 버릇없고 엉뚱한 만화 속 둘리의 캐릭터 때문이었다. 집안의 가장인 고길동에게 반말하고 재떨이를 발로 차는 둘리 일당의 행동이 어린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이유에서다.

우리나라에서는 ‘빨간머리 삐삐’로 번역된 ‘삐삐 롱스타킹’ 또한 같은 이유로 환영받지 못했다. 황당한 금서목록은 또 있다. ‘위대한 마법사 오즈’는 여자인 도로시가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이 신의 뜻에 어긋난다며 1928년 시카고의 모든 도서관이 금서로 지정했다.

시대별 금서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불온서적’이라고 낙인 찍은 책들 대부분 뒤늦게 작품성을 인정받아 현재는 권장도서로 신분 상승해 있다. ‘빨간 책’에서 저자들이 소개하는 책들이 교과서용 권장도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친한 친구에게만 살짝 빌려주고 싶은 매력적인 책들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책이 있다. 우리는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잘못 배운다. 그리고 우리는 어릴 적부터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책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수없이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읽으라던 책은 하나같이 지루했다. 옛날 옛적 위인들의 업적을 나열한 책, 착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계몽성 짙은 책이었다. 돌아보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책은 모두 그 시대의 금서였다. ‘마루타’를 통해 사람다움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소개로 100년 전에 태어난 윤동주와 시공을 초월한 사랑에 빠졌다.

어떤 책이 좋은 책일까? 고민에 대한 답은 없다. 초등학생, 청소년, 성인이 시기별로 읽어야 할 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춘기 시절, 잠도 참아가며 읽었던 야한 책을 어른이 된 후 다시 읽었을 때 시시함에 실망했던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남녀 주인공이 손만 잡아도 사춘기 소녀는 설레서 밤잠을 설쳤다. “참았다가 어른 되면 읽어라”하는 어른들 말씀을 들었다면 그때의 설렘과 감흥을 영원히 못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소녀가 어른이 되기까지 몸과 머리를 흥분시킨 책들이 비록 불온서적이었어도 나에게는 그 책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교과서 속 반듯한 가치관을 담고 있는 책들도 좋은 책이지만 약간 삐딱한 책도 나름의 배울 점이 있는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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