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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읽는 책장]추억을 아로새기며

[워싱턴 중앙일보] 기사입력 2016/08/01 07:17

이소영/언론인

인디언 속담 중에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는 말이 있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흐름, 자연의 섭리를 뜻한 말이다. 가끔 잠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한다. 다른 대학을 지원하라던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나는 지금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까. 예전에 만났던 사람과 그때 그렇게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됐을까. 갈 뻔했으나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막연한 생각 말이다.

인연과 필연, 운명을 우리는 거의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사실은 모두 전혀 다른 뜻이다.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 ‘금수’(사진)는 인연과 운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10년 전 이혼을 한 남녀가 어느 날 케이블카 안에서 마주친 뒤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전한다. 이혼 후 재혼을 한 아키는 장애아들을 낳아 키우고 있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아리마가 불륜 상대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헤어졌고 두 사람은 이후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편지를 쓰고 만다.

한때 부부였던 두 사람의 대화는 필요 이상으로 깍듯하다. 부부만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들까지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예의를 차리고 있다. 이혼의 이유는 남편의 외도 때문이었다. 그런데 부부는 왜 그랬는지, 이후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편지에 적으면서도 차분하다.

미야모토 테루 작가는 누구 때문에 사달이 났는지 상욕을 하고 따지는 대신 절제된 표현으로 10년 동안 적당히 아문 부부의 감정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치정을 다룬 다른 수많은 소설들과 달리 이야기에서 품격이 느껴진다.

“‘지금’ 당신의 생활 방식이 미래의 당신을 다시 크게 바꾸게 될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과거 같은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과거는 살아 있어 오늘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지금’이 끼어 있다는 것을 저도, 당신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미야모토 테루 작가의 ‘금수’ 본문 중-

‘금수’에서 남녀의 대화는 작정하고 멋을 부린 서정적 문장이 아니라 담담한 독백형 문장인데도 소리 내서 읽어볼 만큼 몰입도가 높다. 문장이 마치 바람 같다. 스쳐 지나가면서 내 뺨을 계속해서 건드리고 가는 신비로움이 있다. 특별히 어려운 문장을 끌어다 쓰지 않고도 감정묘사가 이렇게 치밀한 것은 미야모토 테루 작가의 힘일 것이다.

장르문학은 사건을 다루고 순수문학은 사건의 여파를 다룬다. 그중에서도 편지 형식인 서간체는 사건의 여파를 다루기에 훌륭한 형식이다. 오늘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서간체에 담기면 일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곱씹게 된다. 이 소설은 편지 형식의 이런 장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 이혼한 시점은 1970년이다. 이 메일과 문자메시지가 없던 시절임을 생각하면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종이편지가 서로에게 얼마나 애틋했는지가 짐작된다. 그리고 편지를 보낸 뒤 답장을 받기까지 한 달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우체통을 뒤지는 아키와 아리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책 제목 ‘금수(錦繡)’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수를 놓은 비단을 뜻하기도 하고 단풍이나 꽃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금수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가 짜여 완성된 사랑의 모습일 수도 있고, 20대에 헤어졌던 남녀가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서 성숙해가는 과정을 의미한 것일 수도 있다.

‘금수’의 두 남녀는 10년 내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되물으며 살아왔다. 책의 끝부분에 가면 물음표, 쉼표, 느낌표 투성이였던 두 사람이 드디어 사랑을 추억의 자리로 되돌리고 마침표를 찍는 장면이 나온다. 남녀 사이의 편지는 으레 달달하기 마련이다. 아키와 아리마의 편지는 사랑을 얻기 위한 달달한 연애편지가 아니라 추억의 자리, 즉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리려는 안간힘을 담은 편지들이라 유난히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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