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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식의 레포테인먼트] 인종차별 극복한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올림픽 역사상 첫 한인 금메달리스트였던 새미 리 박사가 지난 2일 9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1920년 중가주 프레즈노에서 출생한 그는 5피트3인치(약157㎝)의 단신이었지만 세계 다이빙 역사를 다시 쓴 거인이었다.

1948년 런던올림픽 다이빙 10m 플랫폼에서 우승하며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시상대에 성조기를 휘날렸고 1952년 헬싱키에서도 우승, 올림픽 다이빙에서 2연패를 달성한 첫 선수가 됐다. 당시 백인만의 스포츠로 취급받던 수영 부문에서 갖은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일궈낸 위업이었다.

처음에는 유색인종이란 이유로 수영장 입장을 금지당했다.



어렵사리 출입허가를 받은뒤에도 백인들이 쉬는 수요일 하루만 혼자 훈련할수 있었다. 그나마 그가 연습을 마친뒤에는 '더럽다'는 이유로 수영장 물을 새로 받기도 했다.

올림픽에서 미국을 위해 금메달을 땄지만 오렌지카운티 주민들은 그가 이사오고 싶다는 소식에 완강히 집 팔기를 거부했다. 결국 백악관까지 나서 지역주민을 설득한 끝에 남가주에 정착할수 있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민자 신분으로 이민온뒤 가주로 옮겨온 그의 부친은 "자신의 피부색을 부끄럽게 여기면 훌륭한 미국시민이 될수 없다. 다인종 사회에서 아시아인의 긍지와 자질을 퍼뜨리는 것이 너의 의무다"라고 자식을 가르쳤다.

첫 올림픽 직전인 1947년 남가주대(USC) 의대를 졸업하고 군의관(이비인후과)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간 새미 리는 1953년 아시아계로는 처음으로 최우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설리반 상을 받았다.

1960년 로마·1964년 도쿄올림픽에서는 미국 대표팀 코치로 활동하고 1984년 LA·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다이빙 2관왕에 빛나는 UCLA 출신의 그레그 루개니스를 키워내기도 했다. 현재 LA한인타운에는 '새미 리 광장', 웨스트모어랜드 길에는 '새미 리 박사 초등학교'가 존재한다.

1955년까지 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땅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기도 했던 새미 리는 여러차례 모국을 찾아 후배 선수들을 지도하는 등 평생 자신의 뿌리가 한국임을 잊지 않았다.

자랑스런 한인 새미 리의 명복을 빈다.

bong.hwashik@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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